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18. 예의는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그 가치가 크다.
예의 바르다는 평판을 얻어라. 이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예의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일종의 마법과 같다. 무례할 때 모두의 분노와 경멸이 일어나듯, 예의가 바를 때 모두의 호의를 얻는다.
사람들은 종종 예의를 겉모습의 단정함으로만 생각한다.
나는 오늘, 병원으로 향하는 가족들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
예의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의 언어인지 새삼 느꼈다.
엄마는 가슴이 답답하고 가래가 심해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해 두셨다.
큰형부는 목디스크 수술이 있었다.
나 역시 방사선 치료와 면담이 잡혀 있었다.
새벽 5시 40분, 각자의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누군가를 보호하기엔 모두가 환자였다.
노인이 자녀보다 많은 우리 가족의 현실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제는 아프면 안 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엄마는 새벽부터 불안했다.
큰형부의 수술에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답답해 큰언니에게 짜증을 냈다고 했다.
형부가 “보호자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환자가 어디 있겠는가.
큰언니는 묵묵히 엄마를 챙기며 하루를 시작했다.
시간을 착각한 엄마 때문에 언성이 높아졌지만,
그 속엔 다 걱정이 섞여 있었다.
점심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큰언니는 지친 얼굴로 집에서 멍하니 TV만 응시하고 있다.
“오빠가 곧 온다”고 하니,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늘 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이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이 불편해 보였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자 “엄마 진료 다 끝났어. 근처 식당에서 같이 먹자.”
둘째언니와 형부도 함께 하겠다고 했다.
식탁 대신 식당에서 모인 가족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표정이다.
고기가 나오자 큰언니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고기만 굽고, 된장국에 밥만 말아 먹었다.
나는 계산 문제로 어색해질까 봐 미리 결제까지 해두었다.
식사 중, 둘째언니가 조심스레 말했다.
“형부 병원에 다녀와. 세째가 차로 데려다준대.”
오빠가 그렇게 전해달라 했단다.
그 말이 어쩐지 마음을 울렸다.
식사를 마치고 오빠와 둘째언니는 봉투를 내밀었다.
큰형부 병원비에 보태라며 준비해 둔 돈이었다.
각자 아픈 사정이 있지만,
그 마음이 모여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다.
엄마의 아픔을 내가, 나의 아픔을 오빠와 언니들이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하루, 우리는 각자의 통증을 감추며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는 예의를 지켰다.
그 예의는 아무런 형식도, 큰 목소리도 없었다.
다만 고기를 구워주고, 미리 계산해두고,
봉투를 건네는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픈 날이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예의란 결국, 사랑을 가장 조용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