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38. 현명한 의사는 처방할 때와 그대로 둘 때를 구분한다.
내벼려두는 기술. 특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큰 파도가 칠 대는 이기술이 더 필요하다. 인간관계에는 마음의 회오리바람과 폭풍우가 분다. 샘물은 조금만 흔들려도 탁해진다. 그리고 그런 물은 간섭하지 않고 그냥 두어야다시 맑아진다. 무질서를 바로잡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두는 것이고, 그럴 때 스스로 진정된다.
삶에도 그런 지점이 있다. 손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는 때.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지 않고, 그저 조용히 두는 일. 그게 때로는 가장 현명한 처방이다. 아침 8시 반, 병원 대기실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앉을 자리도 없이 서 있는 환자들 사이로 간호사가 아이패드를 건넸다. 설문지를 작성하다 고개를 들면, 누군가는 휠체어를 밀고, 누군가는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한다. 딸로 보이는 여자는 백발의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그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사이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 있다.
순서가 되어 채혈실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는 몇 번이나 혈관을 찾다가 결국 손등으로 바늘을 꽂았다. 짧은 통증이 지나가자, 손끝에 공포가 남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뼈만 남은 손, 휠체어 위의 몸들, 그 속에서 나는 그나마 건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만, 그래도 걷고, 말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진료실 문이 열리고 이름이 불렸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비싼 약으로 항암제를 바꿔야 합니다.” 그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동안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몸이 아프다고 말해도 ‘지켜봅시다’라는 대답뿐이었다.
그 말이 그렇게 차갑게 들릴 수가 없었다. 쓰러져도, 미각을 잃어도, 그는 늘 담담했다. 나는 그런 의사가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겠다. 그의 평정이 무심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탁해진 샘물을 억지로 흔들지 않듯, 때로는 지켜보는 것이 치료의 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내버려두는 법을 배웠다.
마음이 요동칠 때, 굳이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 일.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오늘도 항암실에서 여섯 시간을 보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능력 있는 의료진 덕분에 치료를 이어갈 수 있고, 스스로를 다잡을 힘도 조금씩 자라났다. 다음 진료 때는 밝은 표정으로 의사를 만나야지.
그의 담담한 얼굴처럼, 나도 내 마음의 파도를 잠재워야겠다. 세상에는 고쳐야 할 것도 있지만, 그저 두어야 다시 맑아지는 것들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