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4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관계

137. 자기 취향과 생각을 뛰어넘는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게 만족하라.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만족한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짊어지고, 많은 것을 품고 다닌다. 혼자서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짐승 같은 외로움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신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희은 선배는 10년째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학교 출석률이 좋은 편이라, 하루 결석만으로도 동기들은 금세 걱정이 되었다. 어제 학교에 나오지 않자, 모두들 웅성거렸다. 누군가 이유를 아느냐며 내게 물었다. 나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문자를 보냈다. “시간 되면 역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 어때요?”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좋아요”라는 짧은 답장이 왔다. 약속은 정오였다. 20분 먼저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카페도 좋았지만, 점심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을 먼저 찾기로 했다. 선배가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들렀던 o포국수집이 눈에 들어왔다. 배너에는 김밥, 돈가스 등 메뉴가 다양했다. ‘국수 먹고 위층 카페로 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잠시 후, 선배에게서 “딸이랑 손주도 데려가도 될까?”라는 문자가 왔다. “물론이죠.” 그렇게 답했다. 역 앞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님, 여기요!” 손을 흔들자,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다가오자마자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얼마 전에 돌잔치 했는데, 답례품이야. 행주인데 필요하실 거예요.” 웃으며 받았다. 식당 이야기를 꺼내자, 선배는 딸이 좋아하던 시장 안 국수집이 있다며 그리로 가자고 했다. 시장 안을 한참 헤맸다. 선배는 “나처럼 길치는 없을 거야”라며 민망하게 웃었다. “저도 그래요.”라고 하려는데, 선배가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켰다. “저기야!”


국수집은 작은 가게였다. 김치국수와 잔치국수, 두 가지뿐이었다. 우리는 잔치국수 세 그릇을 주문했다. 손님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었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계산을 두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유모차를 끌고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선배의 딸이었다. 돌 지난 손자는 유난히 얌전했다. “여자아이 같다고들 해요.” 딸이 웃으며 말했다. 이유식을 꺼냈지만 아이는 먹지 않았다. 우유도, 키위도 거부했다. 그때 일하시는 분이 “잔치국수 나왔어요!”라고 말했다. 일어나서 받아오려 하자, 선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앉아 있어. 딸이 가져올 거야.”


나는 “애 보기도 힘들 텐데 이런 것까지 시키는 건 아니지.”라며 일어났다. 그 사이 딸이 쟁반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당당히 걸어왔다. 젊은 기운이 느껴졌다. 식사 중 선배는 파워포인트 자격증이 있는데 가계도를 못 그리겠다고 했다.


“분명 A등급을 받았는데, 2024년 버전이라 그런가?”

“한번 봐드릴게요.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프로그램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 기능을 몰라서 헤맸던 것이다. 알려주자,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혼자 할 수 있겠어.”


집을 나서며 함께 걸었다. 그제야 선배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요즘 우울증이 다시 도져서… 죽고 싶은 생각만 들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사람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돈이 필요한데 남편한테 달라 하면 욕을 해. 그래도 결국 주긴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비참해.” 선배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런가, 누가 나한테 말만 걸어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는 장녀로 태어나,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 속에 시댁과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남편과의 불화도 깊었지만, 친정 부모님은 “참고 살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들만 끔찍이 아꼈던 부모님을 끝까지 지킨 건 나였어. 그런데 장례식에도 안 온 아들을 돌아가시기 여전히 기다리시더라. 이해가 안 돼.”

학교에서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우울감이 찾아온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PPT로 과제하잖아. 나도 그렇게 해야 인정받을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못하는 내가 싫어.”


그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선배의 삶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였다. 어디서부터 위로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저 조용히 말했다.

“선배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선배뿐이에요.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 만족해도 돼요.”

20250817_164506.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희망으로 향하는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