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존재
엄마와 큰언니는 마주 앉기만 해도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누가 먼저 소리를 높였는지도 모르게, 싸움 같은 대화가 시작됐다. 가족들은 늘 긴장했다. 둘이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엄마는 스물두 살에 큰언니를 낳았다. 첫 진통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순간, 도와줄 사람을 불렀다는 이유로 아빠는 할머니에게 매질을 당해야 했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며느리는 평생 구박을 받았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말끝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도 그날의 공포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듯하다.
1960년대 초, 가난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시집살이는 고됐고, 밥 한 끼 마음 편히 먹는 날이 드물었다. 교육도, 여유도 없는 집. 그 속에서 큰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마치고, 동생 셋을 돌보며 자랐다. 살림, 농사, 그리고 엄마의 감정까지. 어린 어깨가 견디기엔 너무 많았다.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큰언니는 다시 엄마의 자리를 대신했다. 가을이면 김장을 하고, 제철 과일을 보내주고, 홈쇼핑에서 산 옷이며 건강식품을 꾸려 택배로 보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알 수 있었다. 형제자매 누구의 집이든, 언니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힘들다고, 올해는 못 하겠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그 계절이면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가끔은 언니를 놀렸다. “홈쇼핑 중독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엄마는 어느 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중환자실, 입원실을 거쳐 퇴원했지만 돌아온 건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노화라는 이름의 병이었다. “내가 엄마를 모실게.” 언니는 조용히 말했다. 몸도 마음도 여유롭지 않았지만, 동생들에게 더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퇴원 후, 엄마는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언니는 마음이 급해졌다. “왜 의사 말대로 안 해!” 소리가 커졌다. 엄마는 상처받았고, 언니는 자책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둘은 다시 마주 앉았다. 큰 글씨 성경책을 함께 읽고, 티브이를 보며 웃고, 하루 한 번은 정성껏 목욕을 시켜드렸다. 엄마의 발을 조심스레 마사지하는 손길이 보였다.
어느 날, 내가 산책을 다 녀왔을 때 두 사람은 깔깔 웃으며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웃어?” 화투를 치다가, 서로 실수한 걸 두고 한참 웃었다는 거다. 제대로 친 판보다, 엉망으로 다시 시작한 판이 더 많았단다.
그날의 웃음소리를 듣고 알았다. 둘은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다. 다만,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뿐이었다는 걸. 요즘 엄마와 언니는 누가 봐도 가장 친한 자매 같다.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함께 걷기를 시도하며, 조금씩 더 웃는다.
병실에서의 공포를 기억하는 우리 가족 모두는 지금 이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언젠가 또다시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기에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을 스스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함께 웃는 시간, 함께 걷는 걸음이 삶을 더 살아지게 한다.
가족의 아픔은 슬픔으로 다가 오기도 하지만, 그 속엔 깨달음이 있다. 더 배려해 줄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건강할 때 미쳐 챙기지 못한 마음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도 알 수가 있다. 상황 상황 알 수 없게 흘러 가지만, 그때마다 선택한 사항이 조금은 후회하지 않을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