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병원 투어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75. 내실이 없는데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건 불행이다.


내실 있는 사람. 겉으로 온전해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온전한 것은 아니다. 내실 없는 자리는 공중에 지은 집과 같아서, 결국 무너진다. 내실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할머니의 병원 진료에 손주가 동행했다.


아침 7시에 직접 운전대를 잡아 오후 3시까지,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냈다. 운전하는 동안 자리가 춥지는 않은지 살피고, 혹시 멀미를 할까 봐 수시로 창문을 열어 본다.


“왜 창문을 여니?”라는 할머니의 말에 손주는 잠시 당황하다가 다시 창문을 닫는다. 표현은 서툴지만,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차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조수석 문 앞에 조심스럽게 대기시킨다. 잠금장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천천히 발을 떼는 할머니를 한 걸음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안전하게 앉은 것을 확인한 뒤, 병원 입구로 휠체어를 민다. 어설프지만 든든한 손주의 등을 할머니는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겨울이면 할머니는 시골에서 해주시던 칼국수와 만두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때는 그 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다. 건강하고 당당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날들로 삶이 가득 찰 줄 알았다. 그 기억 속에 지금의 손주가 있다. 이제는 손주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오지만, 그 시간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채혈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눈을 감는다.


안 아프다고 말하지만, 바늘이 들어갈 때의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긴 시간을 보낸 뒤, 간단히 요기를 하러 근처 중국집으로 향한다. 굴짬뽕과 쟁반짜장, 탕수육을 주문한다. 계산은 할머니 카드로 한다. 오랜만에 사준다며 좋아하신다.


음식은 금세 나온다. 손주는 앞치마를 챙겨 둘러주고, 휴지가 필요할 것 같았는지 할머니 젓가락 옆에 살포시 놓아둔다. 짬뽕 면을 높이 들어 올려 보다가, 끊어지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 가위로 잘라준다. 손주 덕분에 한입 크기가 입으로 들어간다.


면발의 반은 앞치마 위로 떨어졌지만, 할머니는 개의치 않는다. 굴을 찾느라 바쁘다.


“여기 참 맛있는 집이네.”


말을 건네며 계속 드신다. 손주는 휴지를 꺼내 가슴 앞에 떨어진 면을 닦아준다. 자신이 먹는 것보다 할머니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내내 시선을 떼지 않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핀다.


딸은 한 발 늦다.


딸이 존경하는 사람은 친정엄마다. 한 여자로, 한 인간으로 살아온 그 세월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지금도 내 곁을 지키는 이 세상 단 한 사람, 친정엄마는 오늘도 제대로 읽히지 않는 성경책을 손에 쥔 채 하루를 시작한다.


아픈 몸에도 이어지는 그 꾸준함은 딸과 손주를 늘 감동시킨다. 지혜로움 그 자체라 생각한다. 손주 또한 그것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어설프게만 보였던 아들의 모습이 어느새 든든하게 다가온다. 내실이란 결국, 가족 사이에 쌓여온 신뢰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안에서 바른 길을 보여주는 어른.


할머니의 모습은 비록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지라도, 손주를 기본을 지키는 청년으로 이끌고 있다.


친정엄마의 병원 투어는 그렇게,

춥기만 했던 겨울을 따뜻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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