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가 더 오래 간다.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77.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가 더 오래 간다.

너무 친밀한 교제는 피하라. 남들은 너무 친밀하게 대하지 말고, 그들도 당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게 하라. 너무 친밀해지면 완벽함에서 나타나는 우월함도 빛이 바래고, 존경도 얻지 못한다. 별들은 우리와 멀리 있어서 그 화려한 광채를 유지한다.

암이라는 단어가 내 삶 한가운데 놓인 뒤로, 사람들과의 거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가까워지는 일은 위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체력이 필요했다. 몸이 아픈데 마음까지 설명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걱정은 늘 먼저 도착했다.


괜찮냐는 질문, 왜 이렇게 늦게 발견했느냐는 말, 누군가의 지인 이야기를 빌려온 조언들. 모두 나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마음을 받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항암을 견디는 하루에도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에너지를 살아내는 데 쓰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과의 거리를 다시 정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모든 안부에 성실히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것을.


암 투병은 나를 약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경계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는 가까이 다가와도 되는 자리를 내주고, 누구에게는 한 걸음 물러나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차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너무 가까운 관계는 때로 나를 환자가 아닌 ‘이야깃거리’로 만들었다. 몸 상태가 내 소개가 되고, 치료 과정이 안부의 전부가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암으로 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친밀함은 거리 위에 세워질 때에만 존엄을 지킨다는 사실을.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는 의외로 오래 남았다.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 사람들,

괜찮아질 날을 묻지 않고 오늘을 그대로 두어주는 사람들.


그들은 멀리 있었지만, 가장 정확한 자리에 서 있었다.

별이 끝내 빛을 잃지 않는 이유는 우리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기에, 그 빛은 눈부심이 아니라 위로가 된다. 지금의 나는 그런 별 같은 관계를 선택한다. 손을 뻗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 거리.


암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배웠다.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모든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나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일은 도망이 아니라, 회복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관계에서 한 발 물러선다.


조금 덜 가까워도, 조금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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