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에서 인정으로 건너가는 연습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83. 아주 명백한 경우라도 한발 물러서는 게 좋다.

확신이 선명할수록, 오히려 스스로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너무 완고하게 굴지 말라는 말은 결국, 나 자신에게 하는 경고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두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은 모두 어리석다는 말처럼, 판단이 흐려질수록 사람은 더 단단해지려 한다. 그래서일까. 분명하다고 느껴질수록,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뒤로 물러서는 일이 필요하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엄마 차, 휘발유 넣는 거예요?”

졸린 목소리로 묻는 아들의 말에 순간 웃음이 났다가, 곧 마음이 조여 왔다. ‘초보운전’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지 한 달 남짓. 친구들과 경주로 여행을 떠나기 전,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주유소에 들른 모양이었다. 평소 여러 번 이야기해 주었던 내용이었는데도 다시 묻는다. 결국 사람은 직접 겪어보아야 궁금해지고, 확인하고 싶어지는 존재인가 보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운전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경주에 간다고 하면 차라리 내가 태워다 주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는 그만큼 에너지가 있었고, 아이를 감싸 안을 여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나는 아픈 몸이 되었다. 그 사이 자식은 무엇이든 스스로 해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아프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아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자식은 이제 살아가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운전도, 길도, 선택도, 결정도.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와닿지 않으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아들이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 초보운전자에게 고속도로는 두려움 그 자체다. 나 역시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그 감정을 겪었다. 셀프주유소에서 카드 넣는 순서도 몰라 허둥대고, 주유기를 들고 서서 한참을 망설이던 기억. 모든 길이 새로웠고, 이미 갔던 길조차 낯설었다.


시간이 지나니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운전을 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들은 동네에서는 나보다 길을 더 잘 알고, 운전도 가볍게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대견함과 불안이 동시에 올라온다. 옆자리에 앉은 엄마의 마음은 늘 분주하다. 잘하는 모습이 오히려 자만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사소한 방심이 위험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괜히 한마디 더 하게 된다.

이제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응원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에게 되도록 의지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다시 간섭하는 사람이 된다. 자식이 하는 일은 늘 불안하고, 부모가 대신 해줘야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무엇을 선택하든 조바심을 내는 나를 발견한다. 때로는 의견 충돌이 생기고, 말이 높아진다. 어쩌면 이것이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보호에서 인정으로 옮겨가는 길은 생각보다 거칠다.

사실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아픈 내 마음이 앞서 나갈 때가 많다. 내 몸이 건강했다면 조금 더 여유 있게 믿어주고, 덜 불안해하며, 덜 말했을지도 모른다. 잔소리가 늘어날수록 집 안의 공기는 잠시 어두워진다. 다행히도 가족들이 자주 오가고, 대화를 이어 가는 집이라 그 어두움이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자녀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친정엄마가 곁에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의 존재는 집 안에 묘한 균형을 만든다. 자녀에게도, 나에게도 긴장과 불편함이 오래 머물지 않게 한다. 말이 끊기지 않고 다시 이어지게 만드는 힘. 그 덕분에 우리는 또 하루를 넘긴다.

아주 명백한 상황에서도 한 발 물러서야 하는 이유를, 나는 자식을 통해 배우고 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 불안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믿어보는 연습. 쉽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아들이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이틀 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진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한 발 물러서는 법을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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