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4. 고난이 나의 지혜가 됩니다

by 또 다른세상

새벽 세 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뜬다.


정신은 이상하리만큼 맑은데, 그 맑음이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글을 쓰려 해도 문장은 붙잡히지 않고, 책을 펼쳐도 글자가 머물지 않는다. 혹시라도 잠이 조금이라도 오면 자야지, 그 생각만이 반복된다. 침대는 따뜻한데 하체는 여전히 차갑다. 얼음장처럼 식은 다리는 이불의 온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몸은 쉬고 싶은데, 잠은 끝내 오지 않는다.


낮이 되자 마음을 다잡아 본다.

힘을 내자, 운동을 가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오십 미터쯤 걸었을까, 숨이 가빠져 걸음을 늦춘다. 잠시 멈춰 서서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뒤에서 지나가던 부부의 말이 들린다. “길에서 그렇게 서 있으면 지나가지도 못하잖아.” 모자를 세 개나 겹쳐 써서 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별일 아닌 말인데 마음이 움찔한다. 요가원에서는 수업의 절반쯤만 따라가고, 나머지는 쉬엄쉬엄 버텼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일어서자 어지러움이 몰려와 벽을 붙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몸은 분명히 여기 있는데, 중심은 자꾸 밖으로 밀려난다.

밤에는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잠에 빠졌다. 변비가 있어도 속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밤 열한 시, 다시 눈이 떠진다. 또다시 불면의 시작이다. 시간이 흐르자 오심이 올라온다. 몸은 하루 종일 나를 시험하듯 다른 얼굴을 내민다.


오늘 가장 힘들었던 것은 통증 그 자체보다, 통증을 다루는 나의 태도였다.

아픈 곳을 계속 움직이고, 만지고, 풀어준다. 종아리와 발, 발가락, 손가락을 차례로 살핀다. 경직된 어깨를 펴고 내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발을 지압할 때는 온몸에 식은땀이 맺힌다. 시원함보다 통증이 더 또렷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아픔이 통증으로 변해도 계속 이어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내 몸을 놓아버릴 것 같아서.


오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주차장이다.

아이에게 크게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별일 아닌 대화였는데, 단어 하나에 마음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나를 그 순간 또렷하게 마주한다. 감정적으로 표현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힘들수록 말 한마디를 더 신중히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그때 친정엄마가 있었다.

상황을 다 알지 못해도, 혹은 알고 있어도, 엄마는 늘 큰 어른으로 그 자리에 선다. 엄마의 한마디, 한 행동 덕분에 아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화해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풀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서 배운다.


오늘 가장 두려웠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엄마가 아프다는 이유로, 혹은 항암이라는 핑계로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한 건 아닐까. 가족에게 서운함을 감정적으로 쏟아낸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마음을 오래 붙든다.


그럼에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이것이 항암 부작용의 한 과정이라는 이해와, 흔들리는 나를 조용히 붙들어 주는 친정엄마의 존재였다. 오늘의 감정은 희망, 사랑, 가족이었다.


암 이후 나는 분명히 달라졌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도, 이 병을 견뎌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주변의 관심과 위로, 그중에서도 가족의 힘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를 매일 확인한다. 아픈 사람이든, 아직 어린 사람이든,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삶을 끌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더 큰 것을 바라보았다면, 지금의 나는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잃은 것도 분명하다.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었고, 그 안에서의 성장 기회도 함께 줄어들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삶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국 자신의 몸과 가족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오늘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사람들의 안부였다.


크리스마스라며 소소한 소식을 전해 온 지인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초보운전자인 아들이 고속도로를 타고 경주까지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아이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부대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둘째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오늘을 이렇게 남긴다.


크리스마스를, 고독하지만 행복하게, 항암과 함께 잘 보내고 있다고.

고난은 오늘도 나를 흔들었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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