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어 멈춘 날

by 또 다른세상

오늘은 항암을 맞는 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새벽 4시 30분, 어둠이 아직 남아 있는 시간에 몸을 일으켰다. 5시 20분,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오래전 새벽 출근길을 닮아 있었다. 병원에 일찍 도착해 채혈을 하고, 밥을 먹고, 항암을 맞고 돌아오는 하루. 오늘의 일정은 이미 마음속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 계획이 무너지지 않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7시쯤 병원에 도착해 채혈실로 향했다. 휴일이 낀 주라 대기 줄은 길었지만, 채혈은 수월했다.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에도 감사가 먼저 나왔다. 이 정도면 오늘은 괜찮겠다는 안도감, 잘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접수증을 출력하고 체중과 혈압을 재는 동안, 나는 오늘을 ‘순조로운 날’로 분류해 두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귤을 먹고, 사과를 먹고, 단백질 음료를 마셨다. 우거지탕도 먹었다.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몸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확신했다. 오늘은 항암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호중구 수치는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항암은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 몸의 감각과 숫자가 어긋나 있을 때,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임상간호사는 채혈을 다시 해보자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해진 혈관을 다시 찌르는 일 앞에서, 오늘의 항암이 정말 ‘지금 꼭 가야 할 길’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교수는 일주일 더 쉬고 보자고 했다. 말은 짧았고 담담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오늘 내가 붙들고 왔던 모든 계획은 내려놓아야 했다. 항암을 맞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정해 놓았던 ‘오늘의 답’이 틀렸다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낮에 먹은 음식은 속에 남아 있었고, 마음은 계속 무거웠다. 결국 밖으로 나가 조금 걸었다. 몇 발짝을 옮기자 몸이 조금씩 풀렸다. 밥은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걱정하는 친정엄마의 말에 물김치와 밥을 조금 먹었다. 오늘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고, 저녁 9시에는 독서토론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컨디션이 좋다고 믿었던 하루가 결과 앞에서 무너졌을 때, 나는 쉽게 무기력해졌다. 항암을 맞으면 부작용이 두렵고, 맞지 않으면 치료가 늦어질까 두려운 마음.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은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한다고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나 잘못은 아니라는 것. 내가 가려는 길보다, 나를 아시는 분의 길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오늘은 내가 멈춰야 할 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다.


앞으로도 이런 날은 수없이 올 것이다. 나의 일로, 가족의 일로, 지인의 일로. 오늘처럼 예상이 빗나간 날 앞에서, 너무 가슴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내 몸을 더 살피고, 내 몸을 더 사랑하는 것이 곧 맡김이라는 것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잃는 것 같아 보이는 날에도,

사실은 지켜 주심이 있다는 것을.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항암을 맞지 못한 날이었지만,

믿음이 시험받은 날이 아니라

믿음을 내려놓고 맡겨 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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