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00. 행복한 순간에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바라는 것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순간에 불해지지 않는다. 육체는 호흡하고, 정신은 갈망한다, 모든 것을 갖게 되면 모든 것에 실망하고 불만을 품는 때가 온다. 지식에서도 늘 배워야 할 것과 호기심을 가져올 만한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 즉, 소망이 끝나는 곳에서 두려움이 시작된다.

홍대 근처에서 친구와 메뉴를 고민하다 샤브샤브를 먹기로 했다. 서교동 버스정류장에서 식당까지 걷는 10분, 바람이 어찌나 센지 바닥의 낙엽들이 바람과 엉켜 신나게 춤을 춘다. 그 와중에 이 빠진 모양의 낙엽 하나가 친구의 모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다. 모자를 두 개나 눌러썼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이에게 겨울바람은 몇 배나 더 매섭게 파고든다.


한방요양병원에 있는 친구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나타났다. 얼마 전 맘모톰 시술을 해서 통증이 있다면서도, 오늘 컨디션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아마도 약속 때문에 무리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늘 먼저 소식을 전하던 친구의 연락이 뜸해 치료에만 집중하느라 그런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가족을 챙기랴 검사 후유증을 견디랴 나름의 고군분투를 이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암을 치료하며 소통하는 유일한 친구 사이다. 살아온 환경과 가족 관계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려 애쓴다. 50대 초반의 유방암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책임져야 할 나이다. 우선은 맛있게 먹기로 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 중 화려한 초밥이 눈에 띄었지만, 우리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추운 날씨 탓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따뜻한 국물을 찾았다. 누룽지탕과 스프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친구는 야채와 월남쌈 재료를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소스는 어떤 게 좋겠냐 묻는 말에, 나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부쳐 안 먹겠다고 답했다. 친구도 분명 추웠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따뜻한 국물을 홀짝여 보았지만, 몸 안의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소화가 잘 될지, 암에 나쁜 음식은 아닐지 잠시 고민하다가도 결국 배불리 먹었다. 여전히 몸이 떨려 카페는 무조건 따뜻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다시 홍대 거리를 지나 서교동 쪽으로 걷는데, 얼굴을 때리는 강풍에 몸이 비틀거렸다. 주말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건 처음 본다며, 우리는 서로 팔짱을 꼭 끼고 칼바람을 뚫고 걸었다.


단골 북카페에 들어서 커피와 스콘을 주문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암과 자녀, 그리고 부모 형제로 흘렀다. 지금 쓰는 항암제가 몸에 잘 맞아 암세포가 깨끗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건강을 되찾는 2026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두 번째 소망은 자녀들이 용기를 내어 엄마를 잘 찾아와 주는 것이다. 아픈 엄마를 보며 뒤로 숨기보다 곁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 둘 다 같았다. 세 번째는 친정엄마가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기력이 떨어져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는 건 우리에겐 무엇보다 큰 슬픔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은 계속된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현실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음에도 병을 얻었지만, 우리가 짊어진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품고 가야 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던가. 스치듯 지나가 버린 건 아닐까. 작은 소망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겨움 속에서도 살아간다. 거창한 행복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나와 내 친구의 병이 낫기를. 우리 가족이 각자의 역할을 꿋꿋이 해내기를. 그리고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는 따뜻한 관계로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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