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15. 상대방의 의도에 맞게 우리 주의력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의도를 숨기고 접근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교활한 사람은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신경 쓰지 않게 만든다. 거기에 넘어가면 정복당한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진짜 의도를 숨긴다. 진짜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실행할 때는 가짜 의도를 드러낸다.
그날, 케모포트에 주사바늘을 연결하고 항암 부작용 약이 먼저 몸으로 들어왔다.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리고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무슨 일이지?’ 통화를 눌렀다. 항암이 끝나면 병원에서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오빠, 오늘 일 안 해?” “응. 오늘은 쉬려고.” 별다른 말 없이 항암이 끝나는 12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병원 근처에서 기다리며 집에서 가져온 사과 한 조각을 물었다. 용인에서 큰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를, 만나자마자 꺼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큰엄마가 제사를 지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용인 사촌오빠네 집에서 지낸다. 본가 쪽 친척은 거의 남지 않았다. 아빠의 형제는 삼형제였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엄마들만 생존해 계신다. 제사가 끝난 뒤 사촌형수는 떡을 종이백에 담아 건네주었다. 항암 치료로 힘든데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떡과 함께 돈봉투가 들어 있었다. 우연히 본 봉투 안 금액이 적지 않았다. 직접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병원으로 온 것이 오빠의 진짜 이유였다. 엄마 얼굴도 볼 수 있다며 덧붙였다. 돈봉투보다 제사떡이 더 눈에 들어왔다. 도톰한 절편, 시골 떡집에서 바로 나온 듯한 모양이었다. 흰떡과 쑥떡이 하얀 비닐에 넉넉히 담겨 있었다. “굳어서 딱딱할 거야.” 오빠 말에도 떡 하나를 건넸다. 먹을 만했다. 정이 묻어서 그런지 더 그랬다. 꼬깃꼬깃한 흰 편지 봉투 안에는 두툼한 지폐가 보였다. 큰새언니와 큰엄마가 함께 주신 봉투라고 했다. “큰엄마가?” 90세를 앞두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큰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픈 오빠와 함께 지내는 큰엄마. 여름이면 옥수수, 가을이면 들기름을 보내주던 사람. 큰엄마의 이름은 정희 씨다.
오후가 되어 전화를 걸었다. “정희 씨, 뭐 해?” 큰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배추 된장국 먹고 있지. 먹고 싶으면 와.”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픈 엄마를 모시며 어떻게 힘든 치료를 견디고 있느냐며 내 안부부터 묻는다. 큰엄마에게 보답하는 건 치료 잘 받고, 잘 먹고, 건강해져서 얼굴을 보는 거라며 쉬지 않고 말한다. 더 챙기고 싶어도 본인 힘이 그 정도뿐이니 이해하라고도 했다. 몇 번이나 울음을 삼켰다. 친딸도 아닌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엄마들은 늘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촌끼리는 우애 있게 지내라고. 본인은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견뎠고 서운한 일도 많았지만, 자식들만은 서로 이해하며 살기를 바랐다. 사람 노릇 하라고, 자주 찾아뵙고 안부를 물으라고 했다. 엄마와 내가 병이 난 뒤로는 소식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엄마 세대가 앞으로 얼마나 우리 곁에 더 계실까. 아프지 않으면 좋겠지만, 결국 아플 일만 남았다. 내 엄마도, 큰엄마도, 작은엄마도 그렇다.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줄 수는 없다. 경조사가 있어야 만나는, 어쩌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건강을 되찾게 되면 세 엄마를 모시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의도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주의력을 높인다. 그러나 삶에는 계산도 숨김도 없이 도착하는 마음이 있다. 정이담긴 제사떡처럼, 봉투 속 돈보다 먼저 전해진 “잘 먹고 꼭 나아라”라는 말처럼. 피로 맺은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느슨해질 수 있지만,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플 때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친딸이 아니어도, 매일 보지 않아도 누군가는 내 고통을 자기 일처럼 안고 있다.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만으로는 삶을 견딜 수 없다고. 의도를 숨기는 사람을 가려내는 눈만큼이나, 아무 의도 없이 건네진 마음을 알아보는 감각도 필요하다고. 언젠가 모두 아플 수밖에 없다면, 그 전에 더 자주 묻고, 더 자주 안부를 전하자.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쪽을 선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