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25. 자신의 주인이 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주요 단점을 알라.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뛰어난 장점과 균형을 이룬다. 그런데 단점 쪽으로 기울면, 그것은 폭군처럼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단점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남에게는 쉽게 “그 정도면 충분해요”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에게는 그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만 쉬어도 뒤처지는 것 같았고,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았다. 아프다는 사실조차 일정이 끝난 뒤에야 인정했다. 견디는 일이 습관이 되면,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묻는 질문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처음엔 선택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버티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힘들다는 말을 삼키는 대신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잠이 얕아지고, 호흡이 짧아지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쉽게 무너졌다. 나는 그 신호들을 전혀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글로만 옮겨 적었다.
글은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솔직해져도 누군가를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는 곳,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감정은 늘 사람보다 글에게 먼저 건네졌다. 글은 묻지 않고 받아주었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글은 나를 품어주지만,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많은 문장을 써도, 삶의 방향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았다.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신호를 보냈을 때,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덜 다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묻게 되었다. 그 질문은 아주 사소한 변화부터 불러왔다. 완벽을 향해 달리던 기준을 ‘충분함’으로 낮추는 일이었다. 하루를 마치며 성과를 따지는 대신, 오늘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돌아보았다. 쉬기로 선택한 것, 포기하기로 선택한 것 역시 나를 살리기 위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애썼다.
가장 어려운 변화는 참는 습관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는 늘 서툴렀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했다. 긴 설명 대신 짧은 문장으로 말해보는 연습. “오늘은 조금 힘들어.” “이건 혼자 하기엔 벅차.” 그 말 한 줄이 생각보다 큰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을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았고, 해결책이 당장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말하는 순간, 혼자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책임을 내려놓는 일도 배워야 했다. 늘 내 몫이 아닌 일까지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면 내가 하는 쪽을 택했고, 비워진 자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마음은 늘 바빴다. 일을 미루는 것과 내려놓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일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숨이 조금 길어졌다.
과거에 머무는 시간도 줄이려 애썼다. 경험을 성찰로 바꾸는 일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 안에 오래 머물면 현재의 내가 사라졌다. 그래서 생각이 과거로 흘러갈 때마다 질문을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대신, 지금 내 몸은 어떤가를 묻는 쪽으로. 숨은 어디까지 내려오는지, 발바닥은 바닥을 제대로 딛고 있는지, 창밖의 빛은 어떤 색인지. 현재의 감각으로 돌아오는 일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다시 데려오는 일이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흔들린다. 어떤 날은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 몰아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강함을 증명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버텨내지 않아도 하루는 지나간다는 것을. 지금의 필요한 것은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 다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목표는 단순하다. 더 잘 살기보다, 오늘의 나를 내일로 무사히 데려가는 것. 숨이 가빠지지 않게, 마음이 먼저 무너지지 않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조금씩 믿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