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34. 남에게 자기 명예를 다 맡겨서는 안 된다
명예 보증을 받지 않고는 자기 명예를 맡기지 말라. 침묵하면 공동 이익을 얻고, 발설하면 공동 손실을 얻게 해야 한다. 명예가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늘 함께하는 공동 계약이 맺어져야 한다.
왜 공부까지 하느냐는 말 앞에서 “힘들게 왜 공부까지 해?” 아들의 말은 툭 던져졌지만 오래 남았다. 그 순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이유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몸은 항암 치료로 지쳐 있고 병원 일정은 빼곡하다. 피검사 수치에 따라 하루 기분이 달라진다. 그런 시간을 지나며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준비한다. 평생교육원에서 학점을 채워 사회복지학 과정을 마무리 중이다. 겉으로 보면 무리처럼 보인다.
아들 눈에는 애써 버티는 사람으로 보였을 터. 이제는 쉬어도 되지 않느냐는 뜻이었을 터. 아픈 몸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 모습이 안쓰러웠을 터.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말 속에 담긴 걱정을 알기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왜 공부를 계속할까.
현실 이유도 있다. 치료 이후 삶, 다시 일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함, 연금과 노후 계산. 이런 생각이 책상 앞으로 이끈다. 그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환자’가 아니다. 병원에서는 이름보다 병명이 먼저다. 수치와 일정이 삶을 대신 설명한다. 강의를 듣는 시간에는 나로 선다. 과제를 쓰며 문장을 고치고 개념을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통증은 잠시 물러난다. 배운다는 감각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몸은 치료를 받고 생각은 앞으로 나아간다.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병을 마주하고 삶 방향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되찾게 한 시간은 배움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강의를 들으며 다시 섰다. 공부는 더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 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아들은 아직 이 시간을 살아보지 않았다. 인생이 크게 흔들린 뒤에야 알게 되는 감정이 있다. 멈추면 더 깊은 어둠으로 떨어질 듯한 두려움. 그래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 그 복잡한 심정을 “왜 공부까지 해?”라는 한 문장에 담기 어렵다.
그날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공부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언젠가 삶이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붙잡고 있던 엄마 모습을 떠올릴지 모른다.
힘든데 왜 공부까지 하느냐는 질문은 아직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책을 펼친다. 치료를 받는 사람으로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으로 하루를 견딘다. 그 시간이 다시 일으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