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이 된다는 착각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43. 현명한 사람이라도 최대한 의심을 활용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말은, 남을 불신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먼저 점검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워라”는 구절이 있다. 순진함만으로는 세상을 건널 수 없고, 교활함만으로는 사람을 품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그 균형을 놓친 채, ‘좋은 어른’이라는 자리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일 년 전 함께 일했던 아르바이트생을 다시 만났다. 지방에서 홀로 서울살이를 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내성적이었지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조금씩 마음을 나누던 사이였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걱정해주었고, 수술하면 간병을 하겠다고까지 했다. 그 말이 고마워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항암 일정 사이, 어렵게 시간을 내어 약속을 잡았다. 그 아이에게 서울은 여전히 낯설고 외로울 것이라 짐작했다. 혹시라도 힘들지는 않을지, 내 자식처럼 챙겨주고 싶었다. 여유가 된다면 용돈도 쥐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은 세 번이나 미뤄졌고,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만났다. 야윈 얼굴, 화장기 없는 모습. 반가웠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그녀는 질문할 때는 또렷이 눈을 맞추었지만, 내가 말할 때는 자주 시선을 흘렸다. 서울 생활은 어떤지 묻는 말에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공부 대신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때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었다.


잘해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현실이 부끄러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라는 자리에서 응원하고 돕겠다는 생각만 앞세웠다. 그 마음이 혹시 부담은 아니었을까.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많이 힘들었다.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그녀의 마음을 살피기 전에, 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려 한 건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헤어질 때 괜찮다며 사양하는 손에 용돈을 쥐여주었다. 그 순간,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 고정관념이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도움은 주는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결정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현명함이란, 상대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의가 정말 선의인지 의심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그 만남은 내게 작은 깨달음을 남겼다. 상처가 되지 않는 응원, 부담이 되지 않는 사랑,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방식. 함께 일했던 그 친구에게 고맙다. 나를 반성하게 해주었고, 어른이라는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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