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한 기억, 다시 이어진 시간

by 또 다른세상

아침밥을 먹다가 새콤한 오이가 씹히는 순간, 머릿속이 환하게 트였다. 마치 산 정상에서 얼음이 가득 담긴 레몬수를 한 모금 들이킨 것처럼 상쾌했다. 그 맛이 자꾸 떠올라 몇 번이고 오이김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오이김치 만들기 어렵나?”

하루가 지나고, 또 일주일이 흘렀다. 지인이 나눠준 무생채 오이김치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골라 먹던 오이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그릇을 뒤적이며 마지막 남은 오이를 찾다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엄마, 오이김치 만들어 볼까?”

엄마는 짧게 대꾸했다.

“그걸 일이라고 계속 물어보니?”

그 말에 더 묻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오이김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틀 전, 야채 가게에서 싱싱해 보이는 오이를 두 묶음 사 두었다. 이천오백 원. 여섯 개 중 하나는 새벽에 엄마와 함께 먹었고, 냉장고에는 다섯 개가 남아 있었다. 그 정도면 적지 않은 양이었다.

식탁 위 빈 그릇과 반찬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고,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냈다. 비닐을 벗기고 물에 씻으니 아직도 단단하고 싱싱했다. 이 시간쯤이면 엄마는 몸이 아프다는 소리를 종종 내곤 했는데, 도마와 칼, 오이를 가져다 드리자 별말 없이 바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은소금 좀 가져와.”

소금을 한 움큼 담아 가져가니 엄마가 말했다.

“너는 참 손도 크다.”

대중 없이 담은 소금에 대한 타박이었지만, 그 말마저 익숙하고 정겨웠다.

오늘은 엄마가 만든 오이김치를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설거지를 하며 슬며시 웃음이 났다. 힐끗 바라본 엄마의 손놀림은 여전히 능숙했다. 아프다면서도 다음 순서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 놓은 듯했다.

“양파 넣어야 맛 나. 조금 썰어와.”

“파랑 마늘도 가져와라.”

주문이 이어질 때마다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하나씩 가져다주었다. 양념이 차곡차곡 더해졌다. 맛소금, 고춧가루, 깨소금, 물엿, 매실청까지 들어가자 색이 점점 붉어졌다. 긴 나무주걱으로 살살 저어 섞는 모습이 눈에 익으면서도 새삼스러웠다.

빨갛게 물든 양념을 보며 물었다.

“엄마, 맛이 어때?”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입맛이 없는데 무슨 맛을 아냐. 너도 참 답답하다.”

그래도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간을 보았다.

“조금 짠 것 같은데?”

그 말에 엄마도 한 번 맛을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돼야지.”

보름 넘게 생각했던 오이김치였다. 그런데 막상 만드는 시간은 고작 삼십 분 남짓이었다. 아프다면서도 거침없이 재료를 다루고 양념을 맞추는 엄마의 손놀림은 놀라울 만큼 익숙하고 정확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엄마의 손끝에는 오랜 시간 쌓인 삶이 담겨 있었고, 그 손맛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완성된 김치를 나눠 먹는 시간. 그것은 눈에 보이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재산이었다. 배운다는 기쁨과 이어진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마음에 쌓였다.

완성된 오이김치는 김치통에 정성스럽게 담겼다. 양푼에 남은 양념까지 싹싹 긁어 담는 엄마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아낌없이 쓰되, 남김없이 챙기는 그 습관까지도 그대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아침에 시작된 오이김치는 점심 밥상 위에 올랐다. 요양사님과 엄마, 셋이 함께 둘러앉았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식탁 위에 가볍게 퍼졌다.

“어쩜 이렇게 맛있어요.”

요양사님의 말에 엄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쁘지 않은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맛있는 점심을 이어갔다.

그날의 오이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었다. 오래 말해 오던 바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고, 엄마의 시간을 다시 만난 시간이었으며, 함께 살아가는 지금을 또렷하게 느끼게 해 준 한 끼였다.

image.png


매거진의 이전글베란다에 찾아온 봄 엄마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