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2022
한 작품이 영화와 책, 두 가지로 나오면 대부분은 책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가 책에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문장 표현이 깊고 진하다고 해도 책이 영화만큼 좋을 순 없었다. 그리고 이 대사 때문에 나에게 이 영화는 미스터리 범죄물이 아닌 애틋한 로맨스, 순애의 승리로 남았다.
“나는 마침내 인정하게 됐다. 갇혀 있었던 시간 동안 습지에 돌아가고 싶었던 열망과, 탐구해야 할 것들, 발견하지 못한 생물들이 아직 많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는 것을. 또한,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 덕분이었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내가 사랑한 단 한 사람과 나누리라는 희망.”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늪에서 혼자 살아가던 '카야'가 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성장물이기도 하다. 요즘 작품들 사이에서 ‘성장 이야기’라고 하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행복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유행인 것 같다. 특히 사랑을 다루는 작품들에서 ‘독립’이 멋진 여자의 완성이라는 듯한 결말이 많은데, 사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 한 칸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아닌가. mbti와는 별개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도록 태어났는데 어떻게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나 싶다. 어쩌다 우리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비추어지게 된 걸까. 독립이란 어느 새부터 멋지지 않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우리는 결국 누군가와 함께여야 하고, 나는 그중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것을 언제나 꿈꿔왔다. 나는 이걸 내 ‘낭만’이라고 부른다. 현실에서는 대우받지 못하는 ‘낭만’.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나를 기죽이는 말들을 이겨보고자 블로그 프로필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러브 이즈 마이 라이프’. 사랑은 삶의 목적이고, 가장 큰 가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더 높이 올라가서 아주 큰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글거리거나 현실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랑이, 로맨스가 작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나쁜 상황도 많고, 괜히 인생을 꼬는 길이 될 수도 있으니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도 카야와 같은 꿈이 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사랑한 단 한 사람과 나누리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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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로맨스를 갖다 붙일 수는 없다. 어떤 장르든(특히 종말물) 로맨스가 들어가도 된다는 입장이지만(‘멸망 앞에서 보란 듯이 키스하는 게 재난영화 아닌가?’_《땅콩일기》) 미스터리 범죄물이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로맨스를 특히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 즉 늪과 습지라는 장소는 이 작품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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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크게 늪(배경), 사랑(장르1), 그리고 범죄(장르2)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을 때는 모두 이 작품의 배경을 ‘아름답고 신비롭고 몽환적이고 비밀스러운 자연의 공간’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늪과 습지라는 특정 장소를 택함으로써 영화는 사랑과 범죄가 따로 놀지 않게 만들었다. 먼저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생 자연의, 날 것의, ‘섭리’에 초점을 맞춰야 영화는 범죄라는 장르를 담아낼 수 있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도 범죄와 완전히 동떨어지면서 반전 효과를 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카야의 살인을 우리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카야는 싸이코패스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용하고 외진 늪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살인은 크게 기괴하거나 낯선 느낌을 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거나 해치지 않는다.
카야는 늪과 습지에서 혼자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자연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은 카야에게 범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크면서 무수히 봐온 자연의 섭리였을 뿐. 자연 일부로 행동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과 독자들은 카야에게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작가가 카야의 범행을 보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없도록 장치를 만들기 위해 자연이라는 소재를 활용한다.
하지만 별안간 그 암컷 반딧불이 다리를 뻗더니 입으로 수컷을 물어 잡아먹었다. 여섯 다리와 날개 두 쌍을 모조리. 카야는 다른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암컷은 원하는 걸 얻어낸다. 처음에는 짝짓기 상대를, 다음에는 끼니를, 그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_《가재가 노래하는 곳》179쪽
카야가 혼자 사는 늪지 소녀라는 이유로 체이스는 카야를 소유하려 하며 성폭행을 시도하고, 카야의 아빠가 카야의 엄마에게 그랬듯이 폭력을 행사한다. 이 모든 ‘사랑’은 ‘날 것’으로 해석된다.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카야 또한 자신이 자연에서 배운 것들을 사용해 대응하고, 여기에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작품은 관객들이 카야를 판단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막는 것이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인 카야는 처음 연행되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죄책감 없이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고, 맨 마지막 장면에서 카야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는 자신의 범행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이 된다.
자연, 그리고 그걸 담아내는 늪과 습지라는 배경 덕분에 우리는 카야를 미워할 수 없고, 여전히 카야는 우리 눈에 싸이코패스가 아닌 늪에 혼자 사는 외로운 소녀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에 로맨스라는 장르가 아름답게 살아남는다. 테이트는 날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존재다.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게 해 주고 책을 만들 수 있게, 즉 카야를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은 테이트뿐이다. 카야는 오로지 테이트 앞에서만 인간이 된다. 오직 성적인 사랑(자연의 것)과 로맨스가 차이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래서 카야는 테이트에게 죽을 때까지 목걸이를 들키지 않는다. 그 부분은 만나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카야를 위해 완벽한 해피엔딩을 주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대체될 수 있는 그런 일부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으로 남게 해 주기 위해. 여기서 작가는 곧 늪과 같다. 카야를 보호해주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게 만드는 전지전능한 존재. 우리는 이 의도적인 전능함 앞에서 결국 사랑밖에 느끼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