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위로를 필요로 한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돌아가신 아빠가 술잔을 기울이고 계신다. 난 아빠가 술 드시는 게 걱정이 되어, 술을 몰래 버리기도 하고, 술잔에 물을 타놓기도 했다.
"너, 술에 물 탔지? 왜 탔노?" 하면서 화를 내시던 아빠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목소리가 왠지 그립다. 아빠는 기자생활을 하시다가 직장을 잃으시고 하시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 힘든 중년을 보내셨다. 그런 인생의 한을 술로 푸셨다. 처음엔 아빠가 술을 이겼지만, 이내 술이 아빠를 이기고는, 아빠를 삼켜버렸다.
결국은 간경화가 오고 콩팥이 녹아 대학병원에 실려가셨다. 그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오랜 벗과 절교하기에는 그 벗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아니면 그 벗 없이 살기에 인생의 고뇌가 너무 무거웠나 보다.
그렇게 아빠는 슬픔을 술로 버티셨다. 술은 아빠의 슬픔을 잠시 어루만져주는 듯하더니 더 큰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술이 불러놓은 악순환을 보며 난 결코 술을 입에 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느덧 내가 자라 아빠의 젊은 시절 나이가 되어보니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생의 짐과 고민, 무게를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나마 난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버텨가지만, 때로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을 글로 쓴다.
요즘 내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것은 난임이다. 사실, 아기가 안 생기는 상태도 힘들지만 시험관 시술 자체가 너무 힘들다. 몸이 심하게 부대낀다. 시험관 시술을 하면서 작년에 살이 3kg이 빠졌다. 그런데 올해 다시 시험관 시술을 하면서 몸이 바짝 말라버린 듯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몸을 보니, 갈비뼈가 드러나 보인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몸으로 아기를 임신할 수 있을지...
잘 먹어야 몸이 튼튼할 텐데, 먹는 게 너무 힘들다. 먹는 것이 옛날만큼 즐겁지 않다. 20대 때에만 해도, 밥 한 공기가 부족해서 더 먹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밥이 생각나고, 인생의 낙 중 하나가 '먹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의무감으로 밥을 먹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작년에 시험관 시술을 마치고 몸이 많이 축났는지, 밥을 먹으려고 하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밥 먹는 양이 확 줄어버렸다.
잠자는 것도 어쩔 땐 잘 자지만, 가끔씩 불면증에 시달린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찾아와 날 괴롭힌다. 욕심, 걱정, 번뇌들이 얼기설기 얽혀 눈을 감아도 맴돈다. 결국, 아는 선생님께 개인상담을 받았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내 마음속 어린아이를 돌보아주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께서는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족욕을 해 주고 내 마음을 잘 헤아려주라고 하셨다. 내 마음을 헤아리고자 글을 쓴다. 그동안 돌보아주지 못했던 마음을 돌보고, 내 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들을, 애벌레가 누에고치의 실을 뽑듯 뽑아낸다. 그래서 내가 만든 번데기 속에서 좀 쉼을 얻고 싶다.
누구나 인생의 짐이 있고, 자신만의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며, 내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때론 이 무게가 너무 무거워 넘어질 것 같을 때에 글을 쓴다. 아빠가 마치 힘들 때마다 술을 찾은 것처럼, 난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린다. 아, 난 역시 아빠 딸인가 보다. 아니,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인간이란 존재이다. 그래서 아빠는 술로, 난 글로 마음을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