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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Jul 14. 2021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뱁새여도 괜찮아, 내 속도대로 살자

세상에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황새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출처: 서울동물원 동물 정보>


황새는 천연기념물 199호로 멸종위기 야생동물이라고 한다. 목둘레에 보면 흰 깃털이 있는데, 이 깃털로 황새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키가 100~115cm로 키도 크고 무엇보다 붉은빛 다리가 길쭉하다. 우리가 아는 속담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다. 황새와 뱁새 사진을 찾아보니, 정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 찢어지고도 남겠다. 사람들 중에도 황새처럼 태생적으로나 재능이 뛰어나거나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을 빛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뱁새에게 마음이 간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늘 황새가 되고 싶은 뱁새였던 것 같다. 뱁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완전 '귀요미'다. 꼭 날 닮았다. 쪼그만 체구에 숏다리, 뭔가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뱁새는 우리나라 전역에 거주하는 텃새이다.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일 때 긴 꼬리를 좌우로 흔든다고 한다. 나도 뱁새처럼 바쁘다. 행동도 재빠르다 못해 조급한 편이고 시간에 쫓긴다. 이것저것 잘해보려고 애쓰는데 뱁새이다. 그래도 황새를 따라가기에는 멀었다. 앗, 가랑이가 찢어졌다. 이런....!


박사를 졸업하고 소논문을 쓰고자 애쓰고 있다. 박사를 졸업했다는 것은 '독립적인 연구자'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꾸준히 연구물을 내며 살아가는 박사생들이 많다. 나 또한 지속적으로 연구물을 내며 학계에서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그래서 박사를 수료한 선생님과 소논문을 같이 쓰게 되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교수를 목표로 밤잠을 줄여가며 연구에 매진하시는 선생님이시다. 내 생각에 그 선생님께서는 이미 졸업을 하시고도 남으시겠지만, 교수 임용을 위해 박사논문을 미루시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과 소논문을 쓰면서 오랜만에 나의 시간을 빼어 공부에 몰입했다. 소논문을 쓰는 것은 즐거웠고, 논문 주제도 의미 있는 주제였기 때문에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쓰는 과정에서 여러 물음표가 생겼다.


우선 논문을 쓰면서 다시 학계에 발을 붙이려고 마음을 먹으니, 나에게 많은 한계가 있었다. 우선은 지방 국립대 박사라는 점이었다. 과연 지방대 박사로 소논문을 쏟아내고 유명한 저널에 논문을 싣어도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있는가? 이미 해외 박사에 포닥을 거친 사람들도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나의 경쟁력이 어떠한가? 하는 물음표가 생겼다.


이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학원 지도교수님께서 학회 때 사회를 보는 게 어떻냐고 물으셨는데 결국 무마된 일이 있었다. 난 너무나도 기뻐서 그러겠다고 했고, 그때 시간도 비워뒀는데 학회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차, 싶었다. 진행 담당 교수님과 연락을 주고받던 시간이 떠올랐다.


[담당 교수님] "... 교수님 연락처를 주셔서 메시지 드립니다."

[나]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OO초등학교 교사 OOO입니다.

[담당 교수님] 아네 선생님^^


내가 교수가 아니라 선생님이었던 게 문제였다.... 내가 사회자가 맞는가 싶어 학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사회자들은 교수님이시거나,  유명대학 소속인 분들이었다. 난, 소속에서 이미 필터링되었던 것이다. 연락을 주셨더라면, 그래도 시간을 비워두지 않았을 텐데.


거기서 이미 현타(?)가 왔다. 그렇다면 난 왜 지방대 박사과정을 지원했는가?


1. 현실적으로 지방에 살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에 있는 소위 유명한(?) 대학교 박사를 진학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친척 중 서울대 박사과정을 나온 사촌이 있는데, 서울대 박사생들은 직장인이 없고 다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물론 그 과의 특수성일 수 있겠지만). 사립대를 가기엔 학비가 너무 비쌌다.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기도 어려웠고, 가정경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교원대도 생각해 봤지만, 너무 멀었다.

2. 그래도 공부는 하고 싶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가까운, 국립 지방대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같이 공부하던 동료 선생님들과 같이 영어교육과에 진학했다.

3. 혹시 나중에 유학을 갈 경우를 대비했다. 영어교육과에 진학한 이유는, 영어 논문을 많이 익혀 유학을 갔을 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20대 때 당시, 한 교수님께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토요일에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 주시면서 꿈을 심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미국 대학에 어떻게 지원하면 되는지 학술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서 지원서를 내는 법, 거기에 가서 어떻게 생활할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양적 연구를 위한 통계프로그램인 SPSS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부터 질적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연구방법론, 교육학을 다루고 원서를 같이 읽고 해석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첫 해, 석사과정에 필요한 학비만 마련하면 RA(research assistant)나 TA(teaching assistant)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면서 공부할 수 있고, 박사과정에서는 보통 연구 프로젝트비를 받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공부할 수 있다고, 재정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재정은 참으로 크나큰 벽이었다. 그럼에도 교수님과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교수님의 6년 전 메시지는 아직도 내 마음에 큰 힘을 줘서, 소중히 간직해 두고 가끔씩 힘들 때 꺼내본다.


"자네는 밝고 맑은 성품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꼭 이루어 낼 것이라고 확신하네. 나도 자네가 잘 되도록 최선을 다 할 테니 자네도 꿈 잃지 말고 노력하길 바라네.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게!"


그렇게 유학이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유학을 갈 돈이 없었다. 난 친정 쪽을 어느 정도 부양하고 있었고, 결혼 시기가 겹치면서 국내 박사로 타협하게 되었다. 국내 박사, 무시하면 안 된다. 국내 박사 공부가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가? 잠 안 자고 공부하느라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 박사과정을 마무리할 때쯤, 음운론 교수님께서 날 좋게 보셨는지 다시 유학을 권유하셨다.


"계속 준비하다 보면, 기회가 오는 법이야. 잘 찾아보면 풀프라이트 장학금도 있고, 국가장학금도 있어. 교사 10년 했으면 충분히 많이 했네."


그렇지만 연세가 지긋하신 지도교수님께서는 인생의 지혜를 나누어 주셨다.


"자네는 박사 후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 요즘은 유학을 다녀와도 옛날 같지 않아 교수로 임용되기 힘드네. 기회비용이 너무 커. 옛날 같았으면 유학도 가라고 하고 같이 공부도 하자고 할 텐데. 공부가 재밌어 여행 겸 유학을 가는 것은 추천하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있으니 잘 생각해야 하네.


자네는 박사 과정을 하다가 유산도 하지 않았는가? 박사 공부가 고된 것이 원인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네.

요즘은 개인 콘텐츠를 잘 개발해도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대네.


자네 평소에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줄 알았더니, 발표할 때 깜짝 놀랐네. 재미있게 발표하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유튜브를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영어공부는 꾸준히 하는 것을 추천하네.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고, 영어를 잘하는 것은 경쟁력이니."


그렇게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학교에 돌아와 정신없이 담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미 박사 공부를 하느라 소진된 에너지는 다시 잘 올라오지 않았고, 엎친데 겹친 격으로 난임을 선고(?) 받았다. 30대 초반에 박사는 마무리했지만, 시험관 시술을 하며 30대 후반을 보내고 있다. 교수가 되려면 40세 전에는 해외 박사를 마무리하고 와야 한다고 하는데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가고 있다.


40을 앞두고 내 과거의 선택들을 되돌아본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내가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밤에 잠이 안 온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렇지만 괜찮다. 난 그토록 원하던 학계에서의 성취를 이루진 않았을지 몰라도, 소중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남편은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날 사랑해준다. 사람들은 내 외모나, 능력이나, 외적인 것으로 날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남편은 정말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겨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엄마도 내가 공부를 잘하길 원했고, 뛰어나길 원했는데 남편은 그냥 내 모습 그대로 받아준다. 이런 남편이 내 곁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주변에 뛰어난 황새를 따라가려다 여러  가랑이가 찢어졌다. 유산을 했고, 머리에 새치가 하얗게 자리 잡았고, 지금은 난임으로 시험관 시술을 여러 차례 하며 이미 고차수에 접어들었다. 지금도 주변의 황새를 보며 부러워하느라 가끔씩 눈물짓는다. 아무래도 나는 뱁새인가 보다.


그래도 이런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소중한 가족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결국 인생을 마무리할 때에는 황새냐, 뱁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뱁새여도 괜찮다. 가랑이 찢어졌지만 괜찮다. 내 모습 그대로, 난 내 속도대로 인생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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