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샘 Aug 07. 2021

교사, 나로 살아가기

너 자체로 충분히 괜찮아

강요된 역할들 속에서


  “언니, 백신 맞고 입원했어요.”

  오랜만에 연락한 동생이 백신을 맞고 아파서 입원했다는 말에 깜짝 놀라 전화를 했다. 교사가 된 지 10년이 넘어가니 많이 지친다고 했다. 업무는 업무대로 너무나도 많고, 에너지 넘치는 1학년을 두 해 연속으로 했더니 몸이 너무 힘들다고 한다. 방학 동안 쉬지만,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 또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교사가 처음 되었을 때, 학교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서 가슴이 답답했고, 두통에 시달렸다. 화가 쌓였는지 명치가 먹먹해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곤 했다. 과거를 돌아본다. 내 젊은 20대, 30대를 미친 듯 학교에 충성하며 살았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20대 시절,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일하다 11시가 넘어 버스가 끊겨버릴 때면, 택시비가 아까워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뛰어서 집으로 갔다. 그날 하루를 토닥일 여유도 없이 지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못난 교사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다. 나의 건강을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맞바꾼 것 같다.


  어느 정도 직장생활이 안정되고 결혼을 하니, 새로운 역할과 의무가 생겼다. 임신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며, 부모님께 좋은 자녀가 되려고 애쓰는 날 발견했다. 그렇게 가족들을 보살피고 역할에 충실하고자 애쓰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을 돌볼 시간이 적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사치인 듯 느껴졌다. 타인들의 여러 요구를 듣다 보면, 결국 나를 잃어버린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멈춰 있으면 도태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여러 사람의 기준에 맞추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탈진된 상태에서 다시 뛴다.     



내 속도로 가기


 대한민국이란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쟁 속에서 살아왔는가? 학생 때에는 학교 성적으로 줄 세움을 당한다. 두 자리 숫자, 세 자리 숫자가 우리의 가치를 나타내는 가격표인 마냥, 그 숫자에 울고 웃는다. 고등학교 시절, 4당 5 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은 말대로 잠을 줄여가며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수능 점수를 향해 내달렸다. 옆에 있는 소중한 친구가,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냉혹한 사실에 괴로웠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수능 이후에 삶은 그래도 좀 더 여유롭고 편안할 줄 알았다. 그러나 교사가 되고 나니, 새로운 속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속도전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속도전이었다. 그건, 바로 ‘비교’라는 괴물이 만들어 낸 마음의 전쟁이었다.


  ‘OO선생님이 상을 받았대, OO선생님이 승진했대, OO선생님이 책을 썼대!’ 주위 선생님들의 멋진 소식을 들으며 박수를 쳐 드리면서도 부러운 마음에 ‘나도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에 괜스레 나를 채찍질한다. 실은 성공적인 교사생활이 꼭 그런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에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지 않을 때 초조해한다.


  성공이 무엇인가? 결국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이 성공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박수갈채를 갈구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나만의 속도로 가도 될 것을, 타인의 속도를 따라가려다 탈이 난다. 나는 걷는 속도라 뛰기도 힘겨운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세상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다른 이들의 속도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 인생은 속도전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모습대로  필요도 없다.  내게 주어진 자원과 환경 속에서 감사하며  속도대로 방향을  세워서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빠르지 않더라도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된다면, 사랑 주고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면, 작은 능력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느려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내 수업의 색깔 찾기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신규 시절, 옆 반 선생님이 무엇인가를 잘하면 부럽고, ‘혹시나 우리 반 아이가 옆 반에 가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하지?’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선생님, 옆 반에서는 이런 활동도 하던데요.” 이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이는 듯 같았다. 옆 반 선생님은 베이킹도 잘하고, 공예도 잘했다.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여 학급을 경영했다. 옆 반에서 아이들이 담임선생님과 음식 만들기도 하고, 다양한 공예 활동을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나는 뭔가 이벤트를 기획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것 같았고, 요리에도, 공예에도 문외한이었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옆 반 선생님이 하는 것을 이것저것을 따라 했다. 그만한 에너지가 없으면서도 다양한 학급 행사를 계획하고 인디스쿨에서 만들기, 요리 자료를 다운로드하여서 교실에서 해 보았다. 옆 반 선생님이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게 멋져 보여서, 나도 휴식을 마다하고 토요일에 아이들을 모아 축구를 했다. 그런데 난 옆 반 선생님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옆 반 선생님과 나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장점과 옆 반 선생님의 장점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에너지도 다른데 그 선생님을 흉내를 내다보니, 좌절감만 커졌다.


  시간이 지나고 연차가 쌓이면서, 내가 꼭 훌륭한 선생님의 모습을 흉내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진다면, 학생들은 내 모습 자체로 날 따르고 좋아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치 옆집 엄마가 뛰어난 능력과 외모를 자랑한다손 치더라도, 날 사랑해주는 우리 엄마가 최고인 것처럼 말이다. 인연으로 맺어진 너와 나의 존재적 만남 속에서 서로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교직 생애를 살면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은 나일지라도, 나에게는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흉내 낼 필요가 없고, 그것은 불가능하며, 난 나로 살아갈 때 가장 힘 있고 빛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념이 담긴 수업


  “선생님이 원하는 수업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선생님, 수업할 때, 판서를 구조화해야죠.. 학생들 발표 태도를 더 훈련시켜야 할 것 같아요..”등과 같은 평가적 조언에 익숙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수업을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로 살아가는 수업, 내 색깔이 나타나는 수업, 내 삶이 묻어나는 수업은 어떤 수업일까?


  ‘내 수업의 색깔(빛깔)’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내 수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실은 어떤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나의 태도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내가 만나는 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런 나의 관점, ‘난 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한 배움을 주길 원한다’는 신념이 수업의 빛을 낸다.



1. 시각 신경을 자극하여 물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자기파. 태양이나 고온의 물질에서 발한다.

2. 물체가 광선을 흡수 또는 반사하여 나타내는 빛깔.

3. 표정이나 눈, 몸가짐에서 나타나는 기색이나 태도


  선생님들의 성찰지를 읽다 보면, 선생님들의 교과에 대한 신념, 학생들을 향한 마음,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배움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러한 선생님의 태도와 신념이 수업 속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수업 나눔에서는 선생님의 수업 속 신념을, 학생들을 향한 마음을 묻는다. “선생님, 이번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하는 배움은 무엇인가요?” “최근 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어떤 학생에게 마음이 쓰이셨나요?”


  2학기에 내가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배움은 무엇일까? 내가 수업 속에서 실천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 마음에 귀 기울여 보자. 우리는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만, 실은 삶의 본질은 소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2학기에는 좀 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줘야지.’ ‘학생들이 음악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수업을 디자인해 봐야지.’ ‘그림책으로 아이들의 감성을 깨워줘야지’ 등등. 선생님의 작은 실천 속에서 선생님의 빛깔이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서로를 물들이는 시간이 되길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눈에 실핏줄 터지도록 공부하는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