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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Feb 17. 2022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인생의 어느 계절을 보내든지, 그 계절을 지나며 겪는 희로애락이 있다. 유아기에는 힘도 약하고 아는 것도 많이 없는 미성숙한 존재였지만, 부모라는 방패막이 속에서 즐겁게 생활한 것 같다. 어릴 적에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부모님께 사랑받았던 기억,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반짝이고 있다.


추운 강가에서 썰매를 탔던 일, 더운 여름날 강가에서 수영했던 일, 친구들과 고무줄놀이했던 일 등 여러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아빠가 퇴근할 때 사 오시던 아이스크림의 달콤함,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늙은 호박전의 구수함, 엄마가 날 업어주실 때의 따뜻한 온기, 날 안아주시는 아빠의 든든한 모습이 여전히 몸과 마음속에 스며져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부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한 존재였다. 내가 병뚜껑을 못 열면 아빠는 힘센 손으로 병뚜껑을 열어주셨다. 모르는 것이 있어 엄마에게 물어보면, 엄마는 척척박사가 되어 대답해 주셨다. 부모님께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면, 필요한 것일 경우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사 주셨다. 난 나 몰래 고민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아직 순수했고, 철없이 명랑했다.


그러다 청소년기가 되면서 조금씩 인생의 무게를 깨달아갔다. 인생은 마냥 즐겁게 노는 곳이 아니었다. 해야 할 공부가 있었고, 친구들과 경쟁해야 했다. 가끔씩은 미친듯한 광풍 같은 시기를 견뎌내야 할 때도 있었다. 아빠가 아프시던 때, 나뭇가지처럼 말라버린 아빠의 갸녀린 팔다리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아빠의 살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하며, 동시에 인생은 살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이 되고 보니 내 존재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멋져 보이고, 나 자신은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가진 것도, 능력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나의 비교는 논리적이지 않았다.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늘비교했다. 내게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타인에게 있는 것을 동경했다. 지독한 열등감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자존감을 가지라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존감이 키워지지 않는 듯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열등감이 동력이 되어 열심히 일했다. 때로는 일중독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그런 나에게도 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찾아왔다. 불안감 많은 내게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사람, 부족한 내게 '아름답고 지혜롭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과 충만함이었다. 내 존재가 무언가를 잘하거나 성취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보다는 덜 애쓰고, 예전보다는 내게 좀 더 너그러워졌다.


그러던 중 아빠가 아프셨고, 아빠를 천국에 보내게 되었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무게가 확 다가왔다. 인생은 소유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인생은 상실을 견디는 것임을 깨달았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성취하고, 소유하고자 애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건강도, 생명도 다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만, 우리 각자는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참으로 고독하고, 참으로 두렵다. 주변 지인분들 중에서 부모님이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요즘 많이 듣는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린다. 그렇게 강한 줄 알았던 부모님인데, 이제는 우리가 돌보아 드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마냥 의지하고 싶은, 든든한 부모님이었는데 조금씩 약해지는 그분들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의 젊은 시절만큼 강하지 않은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부모님들도 원래 강해서 강하게 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면서 소중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약함을 숨기고 강인하게 이겨내신 것이 아닐까? 나도 좀 더 강인해져서 그분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프지 않은 때가 과연 있었나? 작게는 감기부터 크게는 여러 몸과 마음의 아픔까지, 우리는 이 고통을 지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이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함께 울 수 있는 것 같다. 상처받은 여린 마음이 상처받은 다른 존재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 여전히 사랑은 살아 있어, 인생의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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