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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Jun 01. 2022

관계의 줄타기를 하며

환희와 절망의 경계에서

  “선생님 수업 너무 맘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공책 검사 중이었다. 한 학생이 공책에서 두 문장을 발견하고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내 수업이 맘에 든다는 말에 하루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가 왠지 좋은 선생님이 된 것만 같았고, 다음 수업도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이 날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는 순회 지도를 하며, 영어를 어려워하는 학생을 도와주려고 할 때였다. “제가 할게요.” 하며 굉장히 방어적으로 날 대하는 학생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교사의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 같다. 난 최대한 민수(가명)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무심히 지나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흔들리는 지점에서, 예전 같았으면 나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대며 자책했을 텐데 민수가 이해되었다. ‘아, 친구들 앞에서 영어 못하는 학생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구나.’ 며칠 후, 영어 수업 시간 학생들끼리 오고 가는 대화를 들었다. 대화 중 나도 끼어들어, “민수는 지난번에 보니까 영어 잘하더라. 열심히 하고.”하고 그 민수의 자존심을 추켜세워주었다. 그렇게 민수와의 관계는 조금씩 부드러워져 갔고, 수업은 훨씬 수월해졌다.

  수업은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만은 아니다. 학생들의 예민한 마음,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 만나는 시간이고, 거기에 더하여 교사의 마음도 함께 부대끼며 성장하는 시간이다. 수업 속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때로는 격려를 받기도,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거기에서 때로는 인정의 말에 으쓱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무시받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 분노를 느끼거나 슬퍼하기도 한다.

  교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내 수업을 인정해 주는 말이나 학생들의 열정 어린 눈빛에 힘을 얻다가도, 시큰둥하거나 때론 반항 어린 시선을 볼 때면 마음이 타 들어가기도 한다. 한 반에 들어가 수업을 할 때였다. 내가 교실로 들어갔는데 교실 좌석이 바뀐듯했다. 한 학생이 새로 바뀐 짝에게 “나는 영어 시간이 제일 싫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지만, 상당히 언짢았다. ‘그것을 굳이 친구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교사가 앞에 있는데, 소리로 표현할 이유가 있었을까?’란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수업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일까? 어떤 점을 더 힘써야 할까?’ 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업을 열심히 진행하려고 애썼지만, 왠지 힘이 빠졌다. 다행히 교실의 냉담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몇 주 동안 열심히 준비해 간 활동은 꽤 효과가 있어 학생들의 분위기는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의 위기 동안 난 맘을 끙끙 앓았다. 맘고생을 하니 몸도 같이 아팠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으로 완벽한 수업을 할 수 없음에도 완벽을 꿈꾸다 좌절한다. 환희의 순간, 감동의 순간이 있음에도 때로는 깊은 좌절의 심연에서 아파하는 게 수업이다. 그리고 학생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갈등 속에서 상처받는 것이 교사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식을 위해 맘을 강하게 먹듯이,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 나 자신이 어떠한 교사인가에서 시선을 돌려, 학생들의 마음을 살피고 필요를 채워주려 애쓴다. 그런 나의 애씀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 학생이든 동료 선생님이든 그들의 지지를 힘입어 다시 일어선다.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본질적 존재 속성이다. 인간이 서로를 만나 관계적으로 존재하기에 교사는 끊임없이 ‘나는 어떤 교사이며(존재론), 무엇을 믿고(인식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방법론)?’를 질문한다. 특히 교사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성(존재의 의미, 목적, 가치)을 탐색해 간다. 그렇기에 학생과의 관계가 원활하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삶의 활력도 높아진다. 그러나 갈등이 존재할 때, 위기 상황이 존재할 때, 자존감도 무너지기 쉽다. 인간의 실존이 교실 속에서 역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하는 행복한 교실을 꿈꾼다. 교사는 학생을 온전히 이해하고(성격, 관심, 능력, 현재 수준 및 상황 등) 성장을 돕는 교실, 학생은 교사를 존경하며 서로를 믿고 지지하는 교실이 되길 원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원할할 경우,  수업 속 상호작용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학생들은 애착과 신뢰를 바탕으로 수업에 더 집중하며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학생과의 관계를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가꾸어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늘 내게 맴도는 질문이었다. 학생과 어떻게 교육적인 관계를 맺을 것인가? 12년 넘게 교사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질문 속에서 살아가며 길을 찾아 헤맨다. 난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상당한 에너지를 쓴다. 게다가 갈등을 회피하는 편이라 거절을 어려워하고 상대방에게 쓴소리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신규 시절에는 문제 행동을 보이는 학생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선생님은 왜 화를 못 내요?” 옆반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셨다. 그랬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그 배경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관계의 장벽이 되어 작용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행히 학생들과 관계를 맺는데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학생들의 인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나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타자’였던 것이다. 개별 학생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는 법을 배우면서 교실은 안정되어 갔다. ‘회복적 생활교육’을 교실에 실천하면서 학생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꾸는 법도 조금씩 터득해갔다. 그럼에도 인간관계는 쉽지 않기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엄격함과 너그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수용과 경계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 줄타기를 잘 해낼 수 있도록 균형을 잡고자 애쓴다.

   

수업 나눔에서 교실 속 학생과의 관계 성찰하기

  수업 디자인, 자료 준비, 평가와 같이 머리로 하는 것은 할만했다. 내게 제일 어려운 것은 학생과의 관계였다. 열심히 밤늦게까지 수업을 고민하고 디자인해서 실행하지만, 왠지 학생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렸다. 왠지 나는 늘 부족한 사람 같았다. 아마 초임 2년 차, 학교폭력 사건과 학생들에게서 느꼈던 거부감이 마음의 생채기로 남아있는 듯하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줄 만한데, 여전히 난 나에게 엄격했다.

  수업 나눔을 하며 학생과의 관계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여전히 내 맘속에는 신규 때의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재의 학생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두려움의 렌즈로 현재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고학년 남학생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요. 제가 엄격하지 않아 학생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의 전형적인 특성이에요. 학생들이 이번 수업에서는 집중도 잘 하고, 활동에도 잘 참여했어요”라는 수업친구의 말에 다시금 교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는데, 내가 두려움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업 안내자 선생님께서 학생들 인터뷰를 틀어줬는데, 내가 걱정했던 남학생들의 해맑은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나 혼자 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수업나눔은 내가 만들어놓은 두려움의 감옥에서 스스로 용기내어 문을 열고 나오게 했다. 나의 왜곡된 생각에서 빠져나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내 수업과 학생과의 관계를 성찰하게 했다. 수업나눔을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옹이진 상처에서 새로운 자신감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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