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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Aug 02. 2022

같이 아파할 수 있는가?

윤동주와 함께

글을 다시 쓰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 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



 이 시를 마주한 순간, 지금까지 썼던 9월호 글을 다 지우고 새로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좋은 교사 수업코칭 글은 써야 하는데, 이미 날짜는 마감을 알리고 있었다. 난 논문에서 읽었던 현학적인 용어들을 글 속에 나열했다. 머리를 싸매며 요즘 공부하는 ‘교사주체성’을 수업코칭에 연결하고자 매달리고 있었다.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개념을 붙들며 글을 완성했다. 휴, 이제 숨을 좀 돌리자.

 저녁이 되어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월간 김태현> 참여했다. 수업코칭연구소 경상지역 멤버이시며, ‘윤동주 시의 실존의식 연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신 김형태 선생님께서 윤동주에 관해 강의를  주시는 시간이었다. 윤동주의 어린 시절부터 어떤 사람들과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알아보고, 윤동주 시를 하나하나 읽고  시에 관해 이야기를  주셨다. 이전에 몰랐던 윤동주의 삶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윤동주의 삶과,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고통받고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로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윤동주, 「투르게네프의 언덕」



  윤동주의 시 속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공장에 다니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시에서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인 윤동주가, 나중에는 「병원」 시에서 아픈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방관자에서, 같이 고통을 느끼는 이웃이 되는 순간임을 김형태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글을 다시 쓰고 싶었던 이유는, 글을 마음으로 쓰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 당시 시대를 향한 슬픔,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연민과, 조금씩 행동하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이 시간을 초월하여 내 마음에 와닿았다. 과연 나는 글을 마음으로 쓰고 있는가? 나는 글을 너무 쉽게 쓰고 있었다.


  윤동주 강의를 듣기 전, 나는 교육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교사들이 변화를 만들어가는지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를 보면서, 시대의 아픔을 뒤로한 채, 책 속에 읽었던 글들을 나열하기에 바빴음을 깨달았다. 난 치열하지 못했고, 마음이 냉랭했으며,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일상의 아픔 속에서


 ‘인생은 고통이다’는 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만 보더라도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민족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하기 어렵다. 평화의 시대를 살 때에도, 우리는 생로병사를 겪으며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기도 하고, 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질병의 고통을 감내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인생은 아프다.


  그럼 학교는 어떤가? 학교도 아프다. 선생님들도 아프고 학생들도 아프다. 여러 갈등 가운데 살아가는 교육 현장이기에, 최대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할 때가 많다. 새 학기 함께 생활할 학생들을 제비뽑기로 고르는 경우가 많다. 그 학년에 소문난 학생이 있을 경우, 그 학생이 내 학급에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내 모습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누군가는 그 학생을 맡아야 함에도, 난 그 고통을 짊어지길 두려워하며 피하는 얄팍한 자기 보호 본능에 휩싸인다.


  올해 나는 교과전담 교사를 맡았다. 담임이 아니기에, 학생들과 덜 부대끼지만 담임선생님들의 고충을 옆에서 관찰하게 된다. 학교폭력, 학부모 민원 등으로 고생하시는 담임선생님, 학교폭력 업무를 맡아 갈등 당사자인 학부모들의 온갖 감정을 받아내는 생활부장 선생님을 바라보며, 같이 속상해하지만 대신 그 짐을 이어받아 내년에 짊어질 용기는 없다.


  게다가 업무에 치여 바쁠 때는 주변 선생님들의 고통에, 아픔에 온전히 마음을 쏟지 못할 때도 있다. 수업나눔을 통해 동료 선생님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존재로 공감하며 돕고자 한다는 내가, 눈앞의 업무에 쫓기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도 있겠고, 아니면 양심의 소리를 누르고 일제에 동조함으로 잠시 동안의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저항시를 쓰며 민족과 같이 고통받는 쪽을 택했다.


  윤동주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함께 그 길을 가는 동료들, 독립운동을 하며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한 동료들로 인함일까?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느끼는 슬픔이었을까? 무엇보다 인류를 긍휼히 여기시며 함께 고통받았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 마음속 무디어진 그분의 사랑을 다시 찾아간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윤동주의 「팔복」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왜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들, 고통받는 우리 민족을 구해 주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윤동주는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인생의 고통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땅의 고통을 허락하신 것일까?


  김형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품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다. 김형태 선생님은 본회퍼와 함석헌의 관점을 예로 들며(김형태, 2015), 예수님께서 전능한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연약한 모습으로 사랑 안에서 함께 고통을 당하셨음을 말해주셨다. 수난의 시대,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던 식민지 시대, 예수님의 고난은 고통의 역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 시대를 살아낼 위로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인류와 같이 고난당하셨듯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같이 아파할 수 있고 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공문과 성적처리, 그리고 개인적인 일들로 바쁜 내 시선을 다시 무엇인가를 향해 돌린다. 학교 폭력 사건을 처리하며, 울고 있던 내가 있다. 시험지 뒤에 ‘죽고 싶다’는 아이의 글을 보며 아파하는 내가 보인다. 수업 공개 후, 민망함을 못 이겨 집에 와 괴로워하던 내가 보인다. 아니, 동료 선생님이 보인다. 교실 속 문제로 힘들어하는 선생님이 보인다. 아, 어쩌면 그 선생님이 나였고, 내가 그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결국, 함께 아파하던 동료였다. 그리고 함께 울고 계신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의 사랑이, 윤동주와 우리 모두를 시대의 어려움을 뚫고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듯하다.


P. S. 인생의 고통에 관한 나의 오랜 고민을,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와 삶을 풀어줌으로써 영감을 주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찾아가게 한 김형태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참고문헌>

김형태(2015). 윤동주 시의 실존의식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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