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뉴욕 여행기
그런데 패턴화되어 있는, 습관화된 부분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인생은 너무 행복한 거죠. 시공간 속에서 매번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갑옷을 두르는 게 습관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게 최상의 행복 기술인데 그 습관 중에 독서가 있다면 너무 괜찮은 거죠.
회사 내 라이브러리에서 눈에 띄는 빨간 색깔의 책이 있어서 집어 들었었는데, <이동진의 독서법>이었다. <빨간 책방>과 <푸른밤 이동진입니다> 팟캐스트 애청자로서 반가운 책이었다. 책 내용 중 유독 좋았던 부분은, 독서의 습관화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안전성을 유지해주는 장치로서 역할을 해주는 게 습관인데, 책을 읽기 위해 따로 떼어두는 시간이 나라는 사람의 생활을 안정적이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책 읽는 습관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습관은 나의 여행 습관이다. 바로 독립서점에 방문하는 것이다. 일본 교토에 갔을 때는 게이분샤, 런던북스에 갔었고, 대만 타이페이에서는 열락서점에 갔었다. 일본어와 중국어 책은 못 읽지만, 서점만의 고유한 분위기 덕에 외국에서도 서점은 꼭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책에 압도당하는 분위기보다는, 책에 둘러싸이되 모든 책들이 내 손에 닿을 만한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있는 '휴먼 스케일'에 가까운 서점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 뉴욕 여행에서도 많은 독립서점들을 미리 알아보고 갔다. 책의 도시 뉴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뉴욕에는 개성 넘치는 서점들이 많았다.
76 N 4th St, Brooklyn, NY 11249 USA
캐나다 서점주의 딸이었던 Sarah McNally는 아버지를 이어 미국 땅에서 독립서점을 열었다. 아마존이라는 골리앗에 굴하지 않는 다윗과 같은 독립서점들이 뉴욕에는 참 많은데, 그 중 책이 가지는 의미와 진정성을 잘 담아낸 서점이 바로 맥널리 잭슨이었다. 소호 본점이 유명한 편인데, 우리는 올해 윌리엄스버그에 생긴 2호점에 들러보았다. (뉴욕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심화되어 건물 임대료가 치솟고 있어, 소호 본점은 곧 문을 닫을 거라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했다.) 북적거리는 맨해튼과 달리 한적한 윌리엄스버그에 조용히 자리잡은 맥널리 잭슨 입구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포스터도 만났다. 할로윈 시즌이라 입구에 귀엽게 놓여져있는 호박 한 개도 눈에 띄었다.
잘 팔리는 책보다 읽어볼만한 책들을 적절하게 큐레이션해놓은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서점에 드나드는 지역주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맥널리 잭슨이 지역사회에서 가지는 존재 가치를 엿볼 수 있었다. 서점 직원과 주민들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빛, 조명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맥널리 잭슨의 천장을 구성하는 심플한 조명들이 예뻤다. 서점 안 공간의 조도를 적절하게 구성했고 따뜻한 분위기까지 연출했다.
영우는 우리 아빠에게 선물할 칵테일 레시피 미니북 세트를 선물해줬다.
116 E 59th St, New York, NY 10022 USA
1925년부터 지금까지 3대째 가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오래된 독립서점 Argosy. "We're Still Here!"라는 문장으로, 뉴욕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독립서점이라는 것을 귀엽게 알린다. old, rare, limited, first란 단어가 여기저기 쓰여있었던, 보물 같은 공간. 사서로 보이는 분들의 사무용 책상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는데, 그 모습까지 엄청 멋있었다.
계산대 앞에는 빈티지 북커버를 $10에 판매하고 있었다. 손때가 묻어서 더 아름다웠다. '빈티지의 기본은 그동안 쌓아온 품질의 지속성과 고유의 이야기를 잘 보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시간의 기록과 흔적은 절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 Argosy 서점의 분위기 자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빈티지를 좋아하는 우리가 푹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서점, 우리 취향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828 Broadway, New York, NY 10003 USA
이곳 역시 3대째 운영되고 있는 뉴욕의 터줏대감 서점. 뉴욕서점들을 알아보면서 읽은 한 블로그 글이 말하길, 움베르트 에코가 '미국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으로 칭한 곳이라고 한다. 스트랜드 서점에 들어가면 사람도 많고 책도 많고 서점 굿즈도 많다. 꽤 산만한 분위기인데, 그 안에는 나름의 정돈된 질서가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분야에 맞게 구분하는 역할의 빨간색 표지판은 눈에 잘 띄고, 분야별 간단한 아이콘은 매우 직관적이었다. 친절하지 않은 듯 친절해서 계속 서점 곳곳을 탐험하고 싶게 만들었다. 서점 스태프들이 각자 수기로 적은 서평이 전시되어있는 공간인 Staff's Pick.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책에 대해 적어둔 자신만의 정의들이 놓여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경영서적 코너에 작게 마련된 몰스킨 노트 진열대였다. 진열대에는 'Business needs planning'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센스 있는 마케팅 문구 그 자체였다! 경영서적 코너를 찾는 사람들이 관심있을 만한 제품을 함께 준비해놓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는 것, 멋졌다.
함께 서점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특히 그 사람의 가방 속에는 늘 종이책 또는 전자책이 있고, 그걸 구경하는 일이 재밌다. 때로는 책 내용을 요약해주기도 하고, 감상을 공유하기도 하고, 인상 깊었던 구절을 라디오 DJ처럼 읽어주기도 한다. 제일 재밌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은 오늘도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