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서울 여행기
어김없이 다시 여름이 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더위와 끈적한 습함이 함께 찾아오는 계절. 이 계절에 여행을 떠났다. 남자친구가 두번째 이직과 함께 보름 간 휴식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볼까 하는 지역들의 눈여겨봤던 숙소들은 이미 예약이 다 마감되어서, 이번에 우리는 서울 여행을 계획하기로 했다. 둘다 J형인 우리는 유독 이번 여행은 계획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걸까. 일정, 숙소만 정해놓은 채로 우리의 서울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 여행은 화요일에 시작해서 금요일에 끝나는 일정. 굳이 주말을 끼지 않고 휴가를 4일이나 내기로 한 이유, 평일을 다르게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구글킵에 기록해둔 <평일도 인생이니까>라는 책 제목이 여행을 요약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직장인인 나의 평일은 회사 출퇴근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는데, 요즘은 특히 날도 덥고 재택근무를 하다보니 평일 활동반경은 동네 밖을 잘 벗어나질 못한다. 그래서 평일 내가 못보던 세상을 보고 싶었다. 꼭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는 여행이 아니어도 나에게 충분한 새로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익숙치 않은 무계획 여행을 시작하기에 호텔은 참 좋은 곳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이 신세계 백화점, 파미에스테이션과 모두 실내로 연결되어 있어서, 의도치않게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실외로 나간 적이 아예 없었던 여행 첫째날이었다. 우리 둘은 암묵적으로 서로 밖에 나가잔 얘기 없이 실내에서 완벽한 피서를 즐겼다. 창밖에 비가 와도 그냥 실내에서 비 오는 운치있는 풍경을 즐기면 그만이었고, 백화점 구경까지 하니 어느새 저녁시간. 첫째날 저녁부터 둘째날 아침, 점심까지 호텔 안에서 배고플 틈도 없이 너무 잘 먹고 사우나까지 하니 하루 끝. 호텔에서는 호텔에 준비된 것들만 잘 이용해도 너무 편리하게 시간이 잘 갔다. 이것이 진정한 피서구나 싶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후 우리는 서촌에 있는 두번째 숙소로 향했다. 사실상 이번 여행의 목적! 우리의 추억과 애정이 담긴 동네에서 여유로운 평일 보내기. 호텔과 달리 이곳에서는 우리가 갈 곳들을 직접 찾아보고 정해야한다. 서촌은 워낙 익숙한 동네라 우리가 좋아하는 곳을 갈지 새로운 곳에 가볼지 고민하면 되는 마음 편한 곳이다. 그런데 숙소에 체크인하자마자 급 피로가 몰려왔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평소에 알게모르게 갖고 있던 긴장이 풀려서일까. 남은 여행 일정을 잘 보내기 위해, 바로 네이버에서 마사지 받을 수 있는 곳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1시간 전신 마사지를 받고 나오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호텔에서는 양식, 일식 위주로 먹었어서 그런지 한식이 먹고싶어졌다. 마침 숙소 바로 근처에 서촌의 오래된 밥집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길래 그곳에 가서 할머니가 직접 차려주신 한식 백반을 먹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 속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힘이 났다. 매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따른 결정들로 여행 일정이 가득 채워져갔다.
여행 3일차인 지금, J형들의 평일 무계획 여행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다. 문득 우리 단골 바의 밤 풍경이 궁금해서 가보기도 하고, 이전에는 가본 적 없는 산책로로 인왕산을 올라가보기도 했다. 대학교 때 추억이 떠올라서 학교 교수회관에 가서 밥을 먹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무작정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들어가서 이런저런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은 휴식을 위해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왔다. 책 읽는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글을 쓰는 중인데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새로운 지역에 갈 땐 어느 정도 큰 틀의 계획을 짜서 가는게 마음이 편한 우리가, 익숙한 동네에선 그때그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즉흥적으로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빅재미를 느끼는게 새삼 즐겁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잘 맞아떨어질 때마다 여기저기 숨겨져있던 행복을 직접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제 앞으로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여백의 미를 남겨두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비워두는게 아니라 남겨두는 것. 어느날 주절주절 적어본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처럼, 나는 많이 변했고 지금 변한 내 모습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