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술을 샀다. 오늘 필요한 커피색 스타킹도 같이. 그 스타킹의 올이 나갔다. 갈라진 엄지발톱 가장자리가 올에 걸려 곤두섰다. 피가 배어 나온다. 탄식한다. 잠시 바라보다가 스타킹을 벗어 방 한구석에 던진다. 어딘가 두었을 손톱깎이를 찾아 나선다.
오늘 상대할 고객인 J는 스타킹을 신어 달라고 요구했다. 10도 아니고 30도 아닌, 정확히 20 데니어 커피색 팬티스타킹을.
일을 하다 보면 각 성벽에서 비롯된 다양한 요구를 받곤 한다. 스타킹, 양말, 속옷 같은 것들을 입어 달라는 요구는 예사다. 그것들을 소장 목적으로 구매하겠으니 며칠 동안 세탁하지 말고 입어 달라거나, 심지어는 타액이나 대소변을 구매하겠다는 이들도 있다. 하경은 ‘같은 업계에 몸을 담았을지언정 목적과 행위에 따라 급(級)은 분명하게 나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위생적이고 번거로운 후자의 요구를 하는 변태들에게는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전해 왔다.
조건 만남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스타킹을 신어 달란 요구를 받았을 때, 하경은 출근할 때 신던 스타킹을 가져갔었다. 일이 끝나면 직접 처분할 계획이었지만, 상대는 그 스타킹을 원했다. 하경이 거절하자 그는 지불한 추가금을 들먹였다. 심지어 모텔방을 나가지 못하게 문을 막고 생떼를 부렸다. 실랑이 끝에 결국 뺏기다시피 스타킹을 건넸다. 외간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섞고 있으면서 그의 손에 평소 신던 스타킹을 쥐여주고 오는 것은 중견 기업 회사원인 낮의 자신을 두고 오는 것 같아서 그랬을까. 불쾌했다.
일이 있고 난 뒤로 상대가 스타킹을 신어달라고 요구하면 미리 사 둔 새 스타킹을 가져가서 섹스하기 전에 갈아 신는다. 그 대가로 기본금과 별도로 삼만 원의 추가금을 받는다.
간혹 상대가 직접 가져온 것을 입기도 한다. 어디서들 구했는지 그들은 일상에서 보기 힘든 이벤트용 스타킹과 속옷부터 수영복, 레깅스, 레오타드, 심지어는 전문직 유니폼을 모방한 복장을 가져와 입어 달라고 요구한다. 일상용 스타킹이나 속옷과 달리 이벤트용은 입어야 할 것이 많고 입는 순서도 복잡하다. 수영복이나 레오타드는 장력이 세서 입을 때 품이 더 든다. 벗었을 때 몸에 벌겋게 자국이 남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일상복을 입어줄 때보다 높은 사, 오만 원의 추가금을 받는다.
하경은 한 남자를 잊지 못한다. 모텔에서 만난 그는 다짜고짜 쇼핑백을 건네며 입어 달라고 말했다. 쇼핑백 속에 든 것은 모방한 복장이 아닌 진짜 교복이었다. 재킷 왼쪽 가슴팍에는 초록색 실로 ‘김성희’라는 이름이 휘갑쳐져 있었다. 하경은 ‘서로의 사생활을 묻지 않는다.’는 업계의 암묵적인 규칙과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한들 설마 자녀의 교복을 챙겨왔을까?’하는 개인적인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물었다. 남자는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 챙겨온 교복의 출처는 고객이 세탁 맡긴 것을 잠시 빌렸다고 밝혔다. 남자는 배시시 웃으며 교복 주인에게 허락까지는 차마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하경은 그날, 배덕 여자 고등학교 재학생 김성희가 되었다. 남자는 하경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성희야, 성희야.’ 불렀다. 그날은 칠만 원의 추가금을 받았다.
세탁소 아저씨가 건넨 칠만 원. 앞으로 그 이상의 추가금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J는 십만 원을 제시했다. 요구에 비해 많은 금액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그는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로 ‘꼭’ 출발하기 전에 스타킹을 신고 집에서 나올 것. 둘째로 예약해 둔 숙소 인근 지하철역에서 만나 동행할 것. 약속 장소를 지하철역으로 정한 것은 하경이 지하철로 이동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테다. 12월인 지금, 지하철은 히터가 세다. 스타킹을 신고 지하철을 탄다면 막 포장지를 뜯은 새 스타킹일지라도 체취가 밴다. 동시에 착실히 스타킹을 신고 왔는지 감시하려는 의도일 테다. 모텔에 들어가서는 씻을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들겠지. J가 건넬 십만 원은 비단 시각적인 것만을 위함이 아니다. 그는 하경의 체취를 사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하경은 수락했다. 어차피 새 스타킹이고 한 시간 남짓 신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부담이 사라졌다. J는 판매자의 입장까지 염두에 뒀을까. 영리하다. 그는 영리한 변태다.
찬장을 뒤지다가 언젠가 넣어 두었던 밴드형 반창고를 찾았다. 손톱깎이는 찾지 못했다. 침대에 앉아 발톱 주변으로 번진 피를 닦는다. 곤두선 발톱의 위치를 바로잡아 반창고의 거즈 부분을 대고 꾹 누른다. 찌릿한 통증에 나지막이 신음한다. 접착부를 발가락에 둘러 붙이고 복층으로 향한다.
옷장 서랍을 열어 양말 한족을 꺼낸다. 반창고를 붙인 엄지발가락이 양말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넣는다. 아래층에서 휴대전화 알림이 울린다. J일 테다. 통이 넓은 일 자 청바지를 입는다. 외투는… 코트가 더 어울리기는 하겠지만, 역시 따뜻한 게 최고다. 파카로 손을 뻗는다. 그러다 옷장 속 가방에 시선이 닿는다. 청담 사거리 백화점에서 할부로 구입한 명품 가방. 가방을 사던 날, 하경은 백화점이 개점하기도 전에 도착했음에도 매장에 들어서기까지 두 시간 동안 줄을 서야 했다. 출퇴근용으로 쓰기에는 과한 듯싶어 주말이나 경조사 때 들려고 했으나, 옷장 안에 모시는 꼴이 됐다. 할부금은 아직 갚는 중이다. 모처럼 들어 볼지 잠시 고민하다가 파카만 챙겨 아래층으로 향한다.
식탁에 앉아 구형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출발하셨나요?
역시. 알림은 J의 메시지였다.
-아직이요.
하경이 답장하자 곧바로 읽는다.
-이제 출발해요.
-와이파이 없는 곳에서는 메시지 확인 못 하니까
-역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J가 무어라 채근하기 전에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휴대전화 알림이 울린다. 무시한다. 화장품 파우치를 열어 쿠션을 꺼내 얼굴을 두드린다. 색이 있는 립밤을 입술에 발라 마무리한다. 항상 식탁 옆에 놓는 출근용 가방에 화장품 파우치, 구형 휴대전화를 넣는다. 신형 휴대전화는 파카를 입고 주머니 안에 넣는다. 가방을 들고 신발장 옆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비추어 본다. 신발장을 열어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현관에 걸린 마스크를 하나 챙겨 불을 끄고 오피스텔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한기가 반긴다. 여섯 시 십오 분. 원룸촌 언덕길을 내려가며 파카 지퍼를 잠가 올린다. 파카의 깃에 화장이 묻지 않도록 끝까지 올리지는 않는다. 공들여 한 화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번질까 봐 마스크도 쓰지 않는다. 올해 9월,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전면 해제되었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편의점이 보인다. 챙겨온 마스크 포장을 벗긴다. 마스크를 꺼내 쓴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다. 생수 한 병, 손톱깎이와 커피색 스타킹을 집어 계산하고 나온다. 역을 향해 걷는다.
역이 있는 큰길에 이르자 평소보다 유난히 연인들이 눈에 띈다. 오늘, 2022년 12월 24일 토요일. 크리스마스이브. 조건 만남을 잡기를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는 바래 가는 오래전 기억이 술을 찾게 했을 것이다. 낮부터 홀로 술판을 벌이다가 이 시간쯤 잔뜩 취했을 것이고 내일은 숙취에 시달렸을 테다. 그럴 바에는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하경은 역사 계단을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