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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25. 2024

5. 8년 전. (2)


경리팀은 하경을 포함해 세 명이 전부였다. 경력이 전무한 하경의 주 업무는 영수증 붙이기였다. 사원들이 하경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두고 간 영수증을 법인별로, 월별로, 또 일별로 나누어 이면지에 붙였다. 주 업무가 그런가 하면, 부 업무는 만인의 비서와도 같았다. 사장을 찾는 손님이 방문하면 그들을 사장실로 안내하고 커피를 타서 날랐다. 회사에는 탕비실이랍시고 모퉁이에 싱크대가 있었는데 오전에 한 번, 퇴근 전에 또 한 번. 하루에 두 번씩 수조에 쌓인 컵들을 설거지했다. 그 옆에 놓인 공용 휴지통을 비우기도 했다. 그 외에도 화분에 물을 주거나 식당을 예약하는 등 사원들의 이런저런 심부름들도 모두 하경의 몫이었다. 

월말이나 분기의 마지막 달이면 붙여야 할 영수증은 평소의 몇 배로 늘었다. 그런 날이면 하경을 포함한 경리팀 세 명의 자리는 밤이 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과연 경리팀의 에이스라던 경리팀장의 말대로 김 대리는 각종 신고를 위한 서류 준비부터 매출입 관리, 자금 관리, 회계 등의 경리팀 업무를 홀로 해냈다. 게다가 사원들의 급여와 상여금까지 도맡고 있으니, 그것은 곧 그가 한가하면 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등의 기행을 벌일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들 회사의 누구도 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경리팀장은 자리를 자주 비웠다. 그 이유가 모두 업무를 위한 외출은 아닐 것이라고 하경은 짐작했다. 그러다 보니 김 대리와 단둘이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김 대리는 말이 없었다. 하경도 굳이 먼저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데면데면한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취업 후 하경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주와 부 업무의 반전된 업무량이나, 일에 비해 적은 월급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하경이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겪은 이들과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경은 묻는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자기 학력을 발설한 것을 후회했다. 휴학 중인 학교의 이름이 사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하경에게 ‘다 가르쳐 놓으면 복학하려고 도망가는 거 아냐?’라거나, ‘명문대에선 이런 거 안 알려주나 봐?’따위의 말들을 서슴없이 지껄였다. 그들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회사 내에는 하경과 같은 수준의 대학은커녕 사 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는 간부들 몇 명을 제외하곤 없었다. 인사 파일을 뒤적이다 알았다. 아무런 잠금도 걸려 있지 않아서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사 년제를 졸업한 간부들도 다르지 않았다. 스무 명 남짓 회사에 무슨 이사들이 그렇게 많은지.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됐다는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무실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았다. 어쩌다 출근한 날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골프 자세 연습을 하거나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시간을 축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여자 사원들을 붙잡고 도저히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힘든 농담을 던지며 귀찮게 굴었다. 


생리가 막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생리통을 참으며 영수증을 붙이던 중 영업 이사가 다가와 하경의 책상에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입사 후 몇 달이 지났으나 그를 사무실에서 마주친 건 고작 두세 번 정도였다. 영업이사는 하경의 출신, 가족관계, 휴학 사유 등의 신상을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된 문답이었다. 그런데 질문의 수위가 점진적으로 높아지더니 어느새 하경은 연애 횟수, 남자 친구의 유무, 헤어진 이유 따위를 답하고 있었다. 난처해하면서도 꾸역꾸역 답하는 하경이 재밌었는지 그는 질문의 수위를 더 높여갔다. 희롱과 농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질문의 수위가 선을 넘으려 하자.

“이사님, 적당히 하시고 가세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듯 노트북 액정만 쳐다보던 김 대리가 말했다. 그의 말이 사전에 약속된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사무실 전체가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경리팀으로 집중됐다. 영업이사는 무서운 표정으로 김 대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 대리도 영업이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말려야 하나? 그런데, 내가 말려도 되나? 아니, 말린다고 될까?

하경은 갈등했다. 

“아이, 김 대리 무서워서 장난도 못 치겠네.” 

영업 이사가 말했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김 대리는 물러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그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 비로소 시선을 거두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깻죽지가 당겼다. 긴장했던 것이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훔쳤다.


김 대리와 영업이사의 다툼은 하경의 회사 생활에 변곡점이 되었다. 사람들의 태도가 전과는 판이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원들이 하경의 자리에 두고 간 영수증 모양이 바뀌었다. 전에는 여기저기에, 심지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제는 흩어져 있더라도 노트북 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일 얘기가 아니면 사람들은 하경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업무 외의 목적으로 하경의 자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었다. 당연히 하경의 대학교 이름을 들먹이며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없었다. 괴롭힘이 줄었다기보다는 김 대리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됐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그런 취급이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변화는 회사 밖에서도 있었다. 태성 인터내셔널은 사원 중 남자 비율이 높았다. 그 때문인지 회식이 잦았는데, 회식 때마다 밤늦게까지 아저씨들의 수청을 드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들은 끝도 없이 술을 강요했고 자기들 입속을 들락거리던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이기도 했다. 구역질이 났지만 참고 받아먹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영업이사와 다툰 후로 김 대리는 회식이 있는 날이면 하경에게 참석 의사를 물었다. 하경이 참석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면 김 대리는 야근을 시켰다. 오랜 야근은 아니었다. 사람들 모두가 회식 장소로 떠나고 사무실이 비면 퇴근을 허락했다. 하경이 회식에 참석 하겠다고 답하면 김 대리는 동참해서 하경의 옆자리를 지켰다. 김 대리가 옆에 앉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하경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사무실 사람들이 하경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처럼 하경도 전과 다르게 호감의 시선으로 김 대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외모를 거리낌 없이 마주하기까지 자기 최면을 거는 수준으로 억척스러워야 했지만. 그럼에도 담뱃진에 물들어 검어진 입술만큼은 여전히 끔찍했다.

매일 아침 의례적인 인사를 끝으로 지시와 대답만이 오갔던 경리팀 사원 둘 사이엔 사담이 늘었다. 경리팀장만 자리를 비우면 둘은 눈치 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사이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경은 김 대리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외부인들에게 김 대리의 울타리는 칼날 달린 철조망이었을 테지만, 그 안에 있는 하경에겐 사방으로 두른 솜이불과 같았다.


2015년 크리스마스이브. 금, 토, 일 연휴를 앞둔 목요일이었다. 모두가 퇴근한 시간, 경리팀은 회사에 남았다. 월말과 연말이 겹친 만큼 경리팀장도 자리를 지켰다. 평소에 김 대리는 야근이 길어질 것 같으면 나서서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연신 키보드만 두드릴 뿐이었다. 그의 책상 한구석에는 믹스커피가 담겼던 빈 종이컵이 늘어갔다. 

밤 열 시가 되자 경리 팀장이 퇴근했다. 그는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퇴근해야 한다는 핑계로 처자식을 팔았다. 흔한 격려의 말 한마디 없었다. 김 대리는 조금만 더 하면 끝난다는 말을 벌써 세 번째 했다. 하경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입사하고 한 것이라곤 영수증 붙이기와 잡일뿐이지만, 남은 업무량 정도는 어림잡을 수 있었다. 역시나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된 야근은 크리스마스 당일이 돼서 끝났다.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김 대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경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겨울 새벽 찬바람이 불어와 라이터에 불을 켜는 김 대리를 방해했다. 하경은 코트를 여몄다. 

“먼저 가. 난 이거 피고 갈게.”

마침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김 대리가 말했다. 

“피우는 거 보고 갈게요.”

하경이 답했다. 김 대리가 담배 연기를 머금고 씩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왔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다. 의외로 연인들보다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어울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앞을 지나가면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겼다.

“배 안 고파? 밥 먹고 갈래?”

김 대리가 물었다. 하경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주시면요.”

김 대리가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뗐다. 그러고는.

“가자.”

앞서 걸었다. 하경은 뒤따랐다. 


딱 한 잔씩만 곁들이자고 주문한 소주는 어느새 두 병을 다 비웠다. 김 대리도, 반 잔씩 꺾어 마시던 하경도 술이 올랐다. 하경이 세 병째 소주를 들어 병목을 잡고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김 대리 잔을 먼저 채우고 자기 잔도 채웠다. 김 대리가 소주잔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하경도 잔을 들어 김 대리가 내민 잔에 갖다 댔다. 왁자지껄했던 일본식 선술집은 이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이들만 남았다.

속도 찼고 술도 들어갔으니 졸릴 만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명징했다. 김 대리는 영업이사와 다투었던 일을 구간 별로 몇 번씩 반복하며 과거의 무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느려 하경은 관심을 껐다. 그저 바라보았다.

전구색 조명 아래 김 대리. 그의 성근 머리숱 사이로 누우런 두피가 비쳤다. 그렇지 않아도 쳐진 그의 눈은 술기운에 짓눌려 평소보다 정도가 심했다. 

‘건드려 볼까?’고민하던 차에 식탁 위에 놓아둔 김 대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는 ‘마나님(하트 이모티콘)’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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