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리는 말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휴대전화를 액정이 식탁을 향하게 뒤집었다. 하경은 그의 행동이 여지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더해 연말, 크리스마스, 새벽, 아무 일정 없는 내일 그리고 취기까지. 부추기는 요소들이 갖춰졌다. 그 요소들이 비단 하경에게만 작용하는 건 아닐 것이었다. 하경은 뒤집힌 휴대전화를 덮고 있는 김 대리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가져다 포갰다. 포개진 두 손을 김 대리가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서서히 올라와 하경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에서 하경은 답을 읽었다. 이제 손을 떼려는데, 김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짐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혼자서.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당황해 하경은 다급하게 김 대리를 불렀다. 분명 그의 눈에서 답을 읽었는데…. 하경도 그를 따라 짐을 챙겼다. 그러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김 대리는 벌써 선술집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하경은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손에 든 가방과 코트 자락이 바닥에 닿았으나 그 따위가 아무러한들. 머리가 아팠다. 가방과 코트를 바닥에 닿은 그대로 손에서 놓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껏 자기가 손을 포갠 누구도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실패했을 때 적절한 대응법을 익혀 두지 못했다. 도망치는 그를 잡았어야 했다. 짐을 두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선술집을 떠났더라도 나가서 찾았어야 했다. 이제는 잡을 수도, 찾을 수도 없게 됐다. 타일 바닥이 핑핑 돌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처한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다. 김 대리와 친해지고 나서, 조금 심하다 싶은 농담도 웃으며 받아 주는 그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마냥 쉽게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다. 자만했고 오만했다.
“곧 마감인데, 더 주문하실 거 있으세요?”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하경은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직원은 사과하고 물러갔다.
그래, 아직 집에 도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 대리가 집에 도착하면 일이 정말로 심각해진다. 전화라도 해보자.
하경은 바닥에 놓인 가방과 코트를 손에 들었다. 직원들이 떠나는 하경을 일본어로 배웅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선술집 문을 열자.
“뭐 하다가 이제 나와?”
김 대리였다. 그는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선술집 문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김 대리가 그럴 리 없지.
하경은 조금 전 상황이 아찔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안도했다. 한숨이 나왔다. 다시 눈을 뜨니, 김 대리가 실실 웃고 있었다.
“이차 가자. 맥주.”
김 대리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봉투 안에서 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자취방 어디야?”
그가 물었다.
하경은 긴장이 풀려 그런지, 할 마음이 가셨다.
“그냥 밖에서 먹죠?”
그렇게 말하는 하경의 말을 김 대리는 무시하고 걸음을 뗐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멀어지는 그가 손에 든 꽁초를 멀리 튕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했다. 그 어색함을 깨고자.
“맥주 뭐 샀어요?”
하경이 물었다.
“그냥… 맥주.”
긴장했나?
하경은 생각했다. 이내 김 대리라면 긴장할 만도 하다고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 인근으로 이사한 후에 자취방에 남자를 들이는 건 김 대리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하경도 덩달아 긴장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몸을 실었다. 3층에서 내려 자취방 현관 앞에 섰다. 하경이 도어록을 해제하고 현관을 열었다. 김 대리를 먼저 자취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는 하경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켰다. 그럼에도 그의 육중한 몸 탓에 하경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셔야겠는데… ….”
하경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 이쪽으로 들어오면 되지, 들어와서 문 닫자. 춥다.”
김 대리가 민망한 듯 말하고 조금 더 비켜섰다. 하경이 신발장과 김 대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뒤에서 현관이 닫혔다. 먼저 신발을 벗은 김 대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야 하경은 허리를 숙일 수 있었다. 신발 끈을 푸는데 내용물이 가득 찬 캔이 바닥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고개 숙인 시야에 김 대리의 발이 보였다. 그는 너무나 가깝게 서 있었다. 봉투에서 빠져나온 캔 하나가 굴러 방 한구석에 박혔다. 하경은 숙인 허리를 폈다. 그러자 김 대리는 대뜸 하경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입술을 하경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의 체급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 하경의 등에 현관이 닿았다. 그는 하경의 머리통을 더 꽉 쥐고 마치 짓뭉개듯 입술을 탐했다. 하경은 하루 동안 자라난 그의 수염에 얼굴이 쓸렸고 숨이 막혔다. 입술과 입술이 잠시 어긋난 틈에 한껏 숨을 들이마시자 담배, 믹스커피, 알코올이 한데 섞인 고린내가 들숨에 실려 들어왔다. 하경은 김 대리를 떼어내려고 온 힘 다하여 밀었으나 김 대리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김 대리가 머리통을 놓자 힘이 풀린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하경은 폐에서 그르릉 소리가 나도록 숨을 들이켰다. 김 대리는 주저앉은 하경을 내려다보며 파카를 벗어 방 안으로 던졌다. 하경은 현관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깔고 앉은 코트 자락이 당겨져 닿지 않았다. 김 대리는 하경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그녀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꼭 시체를 옮기듯이. 하경은 급발진하는 김 대리의 행동에 덜컥 겁이 났다.
스무 살. 그러니까 작년 한여름 밤, 외간 남자와 몸을 섞었다. 절정에 도달해서 느낀 기형적인 쾌감은 그동안 하경이 오르가슴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거짓이었다고 주장하듯, 사지를 뒤틀고 일순간씩 숨을 멎게 했다. 그 기형적인 쾌감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남겠다고 부모님에게 고집을 부렸다. 잃어버린 쾌감을 찾는다는 것이 부모님의 감시를 받으며 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고 천안보다는 서울이 더 문란하니까. 따라서 언제가 되더라도 김 대리의 성 능력을 확인할 계획이었다. 그 언제가 오늘이어도 상관없었다. 선술집에서 김 대리의 손 위에 손을 포갰을 때 섹스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지금, 김 대리의 절차와 방식은 틀렸다.
“대리님, 이거 아닌 것 같아요. 잠깐만요.”
김 대리에게 끌려가며 하경이 말했다. 김 대리는 무시하고 하경을 정리되지 않은 이불 위에 던지듯 눕혔다. 하경은 곧장 벽으로 붙어 코트 자락을 굳게 여몄다.
“하지 마요. 저, 진짜로 소리 질러요?”
김 대리가 손을 뻗어 하경의 입을 막았다. 그 바람에 벽에 뒤통수를 세게 찧었다.
“야, 네가 먼저 유혹한 거, 술집 CCTV에 다 찍혔어. 간통죄로 들어가고 싶으면… 질러, 소리.”
김 대리가 하경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꼭 하경의 몸에서 뜯어내듯이.
태성 인터내셔널의 인사파일을 열람할 수 있었던 건, 잃어버린 쾌감을 되찾아 줄 남자를 모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인사파일에 김 대리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 대리를 특정했던 것은 아녔다. 그러기에 그의 외모는 지나치게 혐오스러웠으니까. 단지, 남자를 모색하던 중에 김 대리와 친해질 만한 확실한 계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경의 상반신이 나체가 되었다. 김 대리는 그녀의 청바지를 벗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청바지가 골반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김 대리는 무식하게 힘주어 당겼다. 청바지가 벗겨지며 골반 옆을 긁고 지나갔다. 벌겋게 자국이 남았다. 하경은 눈물이 흘렀다. 김대리는 하경이 울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그녀의 다리를 양옆으로 찢어 벌리고 성기에 고린내 풍기는 입을 갖다 대었다. 그의 더러운 혀가 스칠 때마다 간질거렸다.
더 적극적이지 못 했던 이유는 기혼이라는 김 대리의 신상 탓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사내에서 다른 대상을 물색할 수는 없었다. 김 대리의 과잉보호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조차 앗아갔으니까. 퇴근 후에 유흥가를 전전하며 남자를 구하기에는 동행할 친구가 없었다. 그 전에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그렇게 주저하다가 연말까지 미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경리팀장의 오전 브리핑을 듣고 결심이 섰다. 월말이자 연말인 오늘은 기한 없는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근속 연수가 오래된 김 대리다. 그의 아내는 오늘 김 대리가 늦게 귀가 하더라도 매년 이맘때는 그랬을 테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혀로 하경의 성기를 애무하던 김 대리가 그녀의 성기에 퉤, 침을 뱉고 고개를 들었다.
“잘 안 젖네? 긴장해서 그래?”
그렇게 묻고 그는 손을 하경의 아래로 가져가 침 묻은 성기를 우악스럽게 문질렀다. 하경이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오므리자, 김 대리는 그녀의 허벅지를 때리고 다리를 잡아 신경질적으로 다시 벌렸다. 김 대리의 머리가 다시 다리 사이로 향했다. 퉤. 그는 또 한 번 침을 뱉고 하경을 뉘었다. 김 대리가 위로 올라왔다.
김 대리를 너무 만만하게만 생각했다. 경리팀장의 말대로 그는 결혼한 지 막 일 년이 지난 새신랑이지만, 벌써 돌 지난 아들이 있는 사람이다. 말인즉, 그의 아내는 혼전에 임신을 했다는 얘기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여자와 연이 닿을 상은 아니다. 어쩌면 김 대리의 아내도 지금처럼 당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 역시 결혼을 ‘당한’ 것은 아닐까.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체가 된 김 대리가 발기한 성기를 하경의 성기에 가져다 대고 힘을 주었다. 들어오지 못했다. 하경은 살이 쓸리는 고통에 신음했다. 그 소리가 자취방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직접 입을 막았다. 김 대리가 다시 힘을 주어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두 번째 시도에도 하경의 성기가 길을 내어주지 않자, 그는 일어나서 캔맥주가 담긴 봉투를 찾았다. 김 대리는 봉투 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돌아왔다. 콘돔이었다. 김 대리는 콘돔 포장을 벗겨 자기 성기에 씌웠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침을 잔뜩 뱉어 콘돔을 씌운 성기에 발랐다. 끈적한 침이 늘어져 이불 위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 하경에게 올라타서 성기를 맞추고 힘을 주었다. 속살이 찢어질 듯한 통증에 하경은 비명이 터졌다. 김 대리가 비명하는 하경의 입을 손으로 짓눌러 막았다. 그가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김 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날숨에는 고린내가 실려 왔다. 욕지기가 치밀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김 대리의 허리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공중에서 길 잃은 하경의 두 발이 흔들거렸다. 두 발은 여전히 캔버스화를 신고 있었다.
2015년 12월 28일.
연휴가 끝나고 돌아온 월요일이었다. 김 대리가 사내 누군가에게 그날 밤의 섹스를 떠벌렸을 것이라는 불안은 없었다. 회사에서 그는 혼자나 다름없으니까.
예상대로 사무실은 모양도 분위기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경의 자리에는 먼저 출근한 사원들이 두고 간 영수증들이 소복이 쌓여있었고 경리 팀장은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경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하경 씨!”
경리팀장이 불렀다.
“아이, 몇 번을 불러도 몰라. 연휴 끝났어, 정신 차려!”
그가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그가 부르는 걸 전혀 듣지 못했다. 온 정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지난 연휴, 김 대리가 협박할 때 언급한 간통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퇴근 많이 늦었냐고. 그날…….”
경리팀장이 물었다.
“아뇨… 예.”
“늦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조금 늦기는 했어요. 새벽에 퇴근했으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올해 2월 간통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김 대리는 아는지, 모르는지. 효력을 상실한 법을 들먹이며 협박을 한 것이다. 총알이 떨어진 총을 겨눈 셈이다. 따라서 입장이 바뀌었다.
“어유, 고생했네. 내가 이따 점심 살게.”
경리팀장은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앞뒤 가리지 말고 일단 고소부터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상황을 복기해보니, 이쪽에 아무런 피해 없이 일방적으로 김 대리를 조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김 대리의 손 위에 손을 포개며 먼저 유혹한 건 사실이니까. 증거는 선술집 CCTV에 남았다. 동시에 대학교를 자퇴하느니, 마느니 하는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 바로 작년이다. 이번 사건이 부모님에게 알려진다면 서울에 온 후로 매년 규모를 더하여 사건을 일으키는 꼴이니,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이지 못할 테다.
치료가 필요할 만큼 후유증이 남은 것도 아니다. 심각하게 다친 곳도 없거니와 마음속에 상처가 남지도 않았다. 분명한 목적을 품은 사람은 이만큼 강하다.
생각이 그렇게 흐르자 돌아오는 출근날, 김 대리의 태도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십삼 분. 곧 김 대리가 온다.
“어?”
경리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하경은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그 끝에는 면접 날과 첫 출근 날에 하경을 안내했던 여자 사원이 웬 여자와 마주 서 있었다. 이내 여자 사원이 손으로 하경의 자리를 가리켰다. 낯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경리팀장을 지나쳐 곧장 하경의 자리로 다가왔다. 하경은 주춤 일어서서 여자를 맞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빈약하다 싶을 정도로 말랐다. 순간, 짱. 하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새하얘졌다. 귀에서 삐-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왼쪽 뺨이 화끈거리기 시작하고 이내 시야가 돌아왔을 때, 눈앞에는 마주 섰던 여자가 아니라 책상 서랍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찾았다. 여자는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리팀장은 여자의 옆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하경은 여자의 눈에 담긴 감정들을 쉽게 읽어냈다. 한발 늦은 김 대리가 여자를 뒤에서 안아 끌어냈다. 여자는 끌려 나가며, 고함치고 몸부림쳤다. 경리팀장이 다가와 하경을 추슬러 의자에 다시 앉히고 어딘가로 떠났다. 시선들이 느껴졌다. 여자의 것만큼 따가운.
그래, 영수증을 붙여야지.
의외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점심시간 전에 회사를 나왔다.
경리팀장은 헐떡이며 자리로 돌아와, 일단은 퇴근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났다. 떠나며 그는, 오늘 내로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까지도 김 대리는 다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아마 같은 지시를 받았으리라.
오전 찬바람이 불어와 부은 뺨의 열감을 식혔다. 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길로 산부인과로 향해 검진을 받았다. 지난 연휴 내내 성기가 간지러워 혼났다. 진단 결과는 질염이었다. 약국을 들렀다가 자취방으로 걸으면서는 점심거리를 고민했다.
자취방 문을 열자 섬유유연제 향이 물씬 풍겼다. 이불 빨래를 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직도 향이 머물고 있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사 온 것들을 펼쳤다.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카페에 들러 커피와 샌드위치를 포장해 왔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했다. 처방받은 질 세정제로 질 안쪽도 씻었다. 처음 사용해 봤지만, 제법 원만하게 해냈다. 질정도 넣었다. 머리를 말리고 팬티만 입은 채로 이불에 들어가 누웠다. 눈이 감길 정도로 졸렸으나 잠에 들지는 못 했다. 경리팀장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목을 가다듬어 잠기운을 지우고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오 분도 안 돼서 끝났다. 하경이 한 말이라고는 네, 네, 네. 순 대답뿐이었다. 또 한 번 휴대전화가 울렸다.
- 급여 825,840원
이리도 빨리 털어내고 싶을까.
세정제를 미처 다 싸 내지 못했는지, 질 안에서 밖으로 액체가 주룩 흘렀다. 신경 끄고 눈을 감았다. 그냥… 모조리 귀찮았다. 김 대리도. 회사도. 치우지 않은 샌드위치 포장지와 아직 가방에서 꺼내지 않은 항생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