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땐 저녁 어스름이 깔렸다. 하경은 누운 채, 휴대전화를 더듬어 찾았다. 은행 앱을 실행해 입출금 내역을 조회했다.
- 급여 825,840원
12월 28일, 오늘 오전까지 근무한 것으로 계산한 금액이었다. 이 금액을 포함한 계좌 잔액은 이백만 원 정도.
돈을 모으려는 의지는 딱히 없었다. 다만, 근무하는 동안 야근이 잦았고, 정시 퇴근을 하더라도 어울릴 사람이 없었기에 월급에서 자취방 월세와 공과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이 고스란히 계좌에 쌓였을 뿐이었다.
무려 다섯 달간 일했다. 계좌에는 이백만 원가량의 돈이 있다. 그에 더해 이력서에 적을 경력도 한 줄 생겼다. 따라서 취업까지 작년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대로 행했다. 놀고 먹고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해지면 이력서를 작성하고 수정하고 이런저런 회사에 지원했다. 회사의 연락을 바란 것이 아니라 오늘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사실은 꼭 안정제처럼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설에는 자취방에 남았다. 연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괜히 천안을 찾았다가 처한 상황을 은연중에 발설해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에겐 명절 전에 미리 연락해서 일이 바빠 내려갈 수 없겠다고 둘러댔다. 명절 음식을 싸 들고 자취방을 찾겠다던 엄마를 말리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꼭 정규직이어야만 할까?
그런 생각을 한 건, 계좌 잔액의 백 단위 자릿수가 하나 줄었을 때였다. 대학교를 휴학한 재작년에는 부모님에게 서울에 남을 명분으로 취직을 제시했었기에 어떻게든 그럴듯한 회사에 입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명분 따위는 필요 없었다. 계좌 잔액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무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2016년 3월 4일 금요일.
해가 바뀌고 처음으로 최고기온이 20도를 넘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고작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 겨드랑이에 땀이 뱄다. 승강장에 선 하경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을 보며 초봄 온풍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던 중 안내방송이 울렸다. 동시에 승강장에 바람이 불었다. 부는 바람이 열심히 정리한 머리를 날렸다. 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어 얼굴을 때리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막았다.
고개 숙인 하경의 눈에 승강장 번호 ‘3-4’가 보였다. 승강장 번호가 오늘 날짜와 같았다. 사소한 우연이 왠지 운이 좋을 것이라는 징조 같기도 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스크린도어 너머로 지하철 대가리가 하경의 앞을 지났다. 이내 멈추고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문이 차례로 열렸다. 비스듬히 비켜선 하경은 사람들이 내리길 기다리다가 마지막 승객이 채 내리기 전에 몸을 밀어 넣었다. 평일 오후 지하철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 ‘오늘 면접 보기로 했던 유하경입니다. 출발했습니다~’ 라고 특별히 물결까지 붙여 메시지를 보냈다. 싹싹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면접이라기보다는 꼭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 점장과 처음 대면하자마자 하경은 알았다.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걸. 직원이 아닌 이성으로서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점장은 대학 때 술자리에서 봤던 하경을 마음에 둔 남학생들처럼 행동했다. 하경은 모른 체 했다.
직장 동료와 절대 남녀관계로 엮이지 않는다.
태성 인터내셔널에서 마냥 돈만 들고나온 것은 아녔다.
정규직을 구할 때는 휴학 중이라는 사실이 감점 요소로 작용했었기에 밝히기가 조심스러웠으나, 그 사실을 듣고 점장은 오히려 반겼다. 평일과 주말 근무를 모두 소화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점장은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 달라고 청했다. 하경은 마지막으로 온전히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첫 출근 날은 월요일로 정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카페 아르바이트 꿀팁, 카페 아르바이트 현실 따위를 검색했다. 대체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손님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고 갔다, 동료와 썸을 타고 있다, 사장과 연애를 한다는 등의 이성에 관련된 이야기들만이 하경의 눈에 들었다.
지하철역을 나와 자취방을 향해 걸었다. 거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웠다. 하경 또한 코트를 입지 않았음에도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서울에 봄이 왔다.
당분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서울살이를 유지한다. 동시에 눈에 띄는 구인 공고마다 입사 지원한다. 그리고 틈틈이 연이 닿는 남자들과 지금은 잃어버린 기형적인 쾌감을 추적한다. 연이 닿는 남자들이란, 카페를 찾는 손님들일 것이다.
계획이 서자 하경의 마음에도 봄이 왔다. 불안이 가셨다. 홀가분해졌다. 자축하고 싶었다. 자취방 앞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치킨이 출발했다는 알림이 와 있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치킨을 주문해 두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돈 걱정 때문에 맘 편히 즐기지 못했다. 그랬던 만큼 더 즐겨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발동해 마음이 급했다. ‘닫힘' 버튼을 연속으로 눌렀다. 휴대전화로 안주 삼을 영화를 검색했다. 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앞에 섰다. 도어록 전자음이 평소보다 경쾌하게 들렸다. 현관을 열었다. 그러나 들어갈 수 없었다. 자취방 안에는 가득 찬 종량제 봉투 주둥이를 양손으로 움켜쥔 엄마가 놀란 눈을 하고 아직 회사에 있어야 할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경은 손에 든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냅다 달렸다. 첫발을 떼자마자 후회했다.
코트는 챙길걸.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반대로 뛰어 올라오던 배달 기사와 부딪혔다. 공중에 치킨이 흩날렸다.
“야 이, 씨발년아!”
뒤에서 배달 기사의 고성이 들렸다.
운동과 담쌓은 몸은 하경을 멀리까지 옮기진 못했다. 지하철역에 멈춰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달랬다. 폐가 알이 밴 것처럼 뻐근했다.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했기에 전화를 끊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정돈되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음 상태로 바꾸었다. 미처 다음을 생각해 두지 못했다. 그럴 틈도 없었지만. 별수가 없어 목적지 없는 걸음을 옮겼다.
땀이 식으면서 몸에 한기가 돌았다. 두고 온 코트가 간절했다.
엄마가 찾아오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가지 변명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연차, 반차, 병가 등. 그런데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중 한 단어를, 단 두 음절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까.
시간은 오후 세 시 이십 분. 부재중 전화가 열두 건 쌓여있었다. 최근 통화 목록을 열어 확인했다.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걸었다. 아빠도 상황을 알았다. 사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해프닝에서 극(劇)으로. 극의 장르는 스릴러, 결말은 비극이지 않을까.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아빠였다. 부재중 전화가 열세 건으로 늘었다.
영화에서 비극을 맞은 여주인공은 아스팔트 도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비를 맞으면서 맨발로. 미디어는 비극을 대하는 법을 그렇게 가르쳤다. 요는 후회, 우울, 절망, 좌절 따위의 감정들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고스란히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피폐해진다. 고주가 되도록 술을 퍼마신다. 목적지 없이 몇 시간이고 걷는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순다. 등의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해서 행하는 것이 곧 비극을 처치하는 방법이란 듯 보여 주었다. 보기 중 하나가 아니라 둘을 또는 전부를 선택해도 되었다.
아무래도 여주인공은 못 되겠구나 싶었다. 하루 종일 굶은 탓에 속이 쓰렸다. 당장 눈앞의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과 만두를 주문해서 먹었다. 그다음에는 분식집 옆 카페로 향했다. 맹물이 아닌 뭔가 달콤한 것으로 입에 남은 짠맛을 씻어내고 싶었다. 마냥 철없이 군 것이 아니라.
어차피 죽는다. 그렇다면, 먹고나 죽자.
그런 심보였다. 그러는 동안 열세 건의 부재중 전화는 스무 건을 넘겼다. 주문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앞에 두고 간헐적으로 홀짝였다. 유리잔 안에 커피의 양이 줄어갈수록 입안에 머금는 커피의 양과 홀짝이는 빈도도 덩달아 줄었다.
커피잔 옆에 둔 휴대전화엔 계속해서 부재중 전화가 쌓여갔다. 또 한 건. 엄마인지 아빠인지 누군가의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메시지가 왔다. 확인했다. 엄마였다.
-하경아 엄마 화 안 났어. 어디야? 일단 돌아와서 얘기해.
예상과 다른 부드러운 말투. 막장에서 스며드는 햇빛을 발견한 심정이었다. 그 말투에 경직되었던 뇌가 긴장을 풀었는지 머리가 돌았다.
자취방 안에 있는 엄마를 보고 도망친 이유는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을 들켰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김 대리와의 일들이 떠올라 지레 겁을 먹었다. 김 대리 사건은 진즉에 머릿속에서 배제해 두었어야 했다.
입만 다물면 된다.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 특히 엄마는. 지극히 상식 안에서만 살아온 부모는 자기 딸이 상식 밖의 잘못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물론, 엄마가 태성 인터내셔널을 찾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지만.
이미 잃은 건 내어주자. 자취방으로 돌아가서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그만둔 걸 들켜서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말하자. 그 정도 죄를 고한다고 죽지 않는다. 단, 취할 건 취한다. 오늘 면접을 봤고 직장을 다시 구했으니, 서울에 남겠다고 말하자.
마음을 먹었을 땐, 카페에 혼자 남아 있었다. 직원은 바 안에서 한가로이 휴대전화를 하고 있었다. 카페 내부를 데우는 히터 소리가 웅웅 울렸다. 얼음만 남은 잔 표면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맺힌 물방울 하나가 아래로 굴렀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통화 대기음이 단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디니?”
엄마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가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가 전화를 끊었다.
삐졌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밖에 나와 있는 엄마가 보였다. 할 수 있는 최고로 발랄하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잰걸음으로 걸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엄마 옆으로 종종 달려가 섰다. 엄마가 누르고 있는 버튼을 놓자, 문이 닫혔다. 중후한 기계음과 함께 몸이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들었다.
적막.
하경은 용기를 냈다. 엄마의 왼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화났어?”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물어 놓고는 하경에게서 팔을 빼내어 앞서 내렸다. 팔을 빼내는 동작이 무심하기도 했다. 말투도. 하경은 뒤따라 내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엄마 뒤에 섰다.
그래, 선수를 치자.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알아.”
엄마는 현관문을 열면서 답하고 들어가, 라고 현관문을 닫히지 않게 붙들고 서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말투가 또한 무심했다. 표정도.
하경은 엄마에게서 시선을 옮겨 정리된 자취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일 년 가까이 품어준 그 방이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생물의 아가리 같아 한 걸음 떼기가 어려웠다. 그 어려운 걸음을 내딛기 위해 자기를 다그쳤다.
아무도 모른다.
발을 떼어 현관 너머 신발장에 밀어 넣으며 다짐했다.
오늘도 서울에 남는다.
캔버스화의 신발 끈을 풀면서 태성 인터내셔널을 그만두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두었다. 지어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변명거리가 떠올라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변명거리가 뭐든 간에 요는 공통적으로 퇴사는 당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었다.
뒤에서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크게. 곧 도어록이 잠기는 전자음이 들렸다.
하경은 현관을 등지고 서서, 식탁으로 사용하는 소반 위에 가방 안에 든 것들을 꺼내어 정리했다. 평소대로라면 가방째로 현관 주변에 던져두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일이 필요했다. 김 대리의 아내에게 따귀를 맞고 영수증을 붙였던 것처럼. 엄마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섰다. 보이지 않아도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기척이 없었다. 심지어 숨기척조차도. 그러거나 말거나 거짓 경위를 떠드는 입을 쉬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틈을 보이면 엄마가 그 틈을 비집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 것만 같았다. 하경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엄마는.
“하경아.”
하고 불렀다. 못 들은 체 말을 이어 나갔다.
“엄마, 너희 회사 다녀왔어.”
입을 쉬지 말자.
입을 쉬지 말자.
입을 쉬지 말자.
목소리가 떨렸다.
“너희 회사 다녀왔다고!”엄마는 이번에는 소리를 질렀다. 하경은 소리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바람에 말도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