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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25. 2024

9. 7년 전. (2)


자취방을 계약하던 날, 엄마와 태성 인터내셔널을 지나쳐 걸었다. 엄마는 회사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엄마가 태성 인터내셔널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눈을 너무 꽉 감은 탓에 현기증이 났다. 순간,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천장이 보였다. 허공에는 가방 안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것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가방도 함께. 그것들은 서서히 보다는 빠르게. 그러나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경의 엉덩이가 바닥에 닿자, 시간은 원래 속도를 되찾았다. 허공의 물건들이 제 나름의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뒤통수가 아렸다. 통증을 인지하고 신음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뺨이 얼얼했다. 그다음으로는 정수리가. 어깨가. 등이. 순서대로 아팠다. 하경은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엄마는 멈추지 않고 하경의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목 놓아 울면서. 그러는 두 모녀의 꼴이 내림굿하는 무당들 같았다. 

내림굿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해는 지고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적막 속에서 하경은.

이 정도로 갈무리된다면, 괜찮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짐 싸. 아빠 올 거야.”

엄마가 적막을 깼다. 하경은 잽싸게 엄마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위아래로 어긋나게 비비며 빌었다. 아빠는 못 오게 하라고. 

“벌써 얘기 다 끝냈어.”

매정하게 대꾸하고 엄마는 옷장으로 향했다. 생선의 배를 따는 듯 옷장을 열어 가방과 옷가지를 모조리 끄집어내었다. 그것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담아.”

엄마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제야 하경은 눈물이 터졌다. 하경이 말을 따르지 않자, 엄마는 직접 가방을 열어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그러다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가방으로 바닥을 몇 번이고 때렸다. 가방 안에 든 것들이 흩뿌려져 자취방 여기저기에 널렸다. 엄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하경을 향해 던졌다. 하경을 빗나간 그것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질정이었다. 질염은 감기처럼 걸리니까 구비해 둔다고 해서 어떠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이렇게까지 노한다. 

다 알고 있구나. 

하경은 체념했다. 코청이 아렸다. 코뚜레가 꿴 것 같이. 아빠는 와서, 코뚜레에 고삐를 매어 천안으로 끌고 갈 테다. 하경은 질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오열을 들으며. 

지독한 질염이었다. 소변을 보려고 팬티를 내리면 성기가 닿아있던 곳에는 누런 치즈 같은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수산시장 쓰레기통에서 썩어가는 생선 대가리 같은 악취를 풍겼다. 소변을 볼 땐 성기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은 일주일 분 항생제를 다 복용하고도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근 한 달을 앓았다. 전문의에게 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긴 기간 동안 병변이 없어지지 않자 ‘혹시 심각한 병은 아닐까.’ 하고 불안했다. 병원을 다시 찾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병원 안에서 겪어야 할 과정들. 이를테면 병원까지 가는 것부터,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바지와 팬티를 벗고, 분만 의자에 앉아 양다리를 벌리는 것까지의 과정들이 아득할 정도로 귀찮았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으로 자가 진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다는 질정을 알게 됐고 그것을 두 알 정도 투약하자, 하경을 한 달가량 끈질기게 괴롭혔던 질염은 비로소 나았다. 

남은 질정을 처분해야 했을까? 아니, 그랬다 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현관 문고리가 덜커덕, 덜커덕 소리를 냈다. 소리에는 신경질이 묻어났다.

“문 열어.”

현관 밖에서 아빠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렸다. 엄마가 현관으로 향했다. 도어록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들렸다. 자취방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멎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경의 눈에는 방바닥 말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한숨이 들렸다. 재작년 하경이 대학교를 자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자취방을 찾은 아빠는 신발장에 선 채로, 끝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아빠의 한숨은 그때의 것보다 더 깊었다.

“신발은 벗고 들어와야지!”

엄마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 들어선 아빠의 구둣발이 고개 숙인 하경의 시야에 들었다. 낡은 구둣발은 다가오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어 싱크대로 향했다. 싱크대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려고. 아니, 뭐 하려고!”

엄마가 소리쳐 물었으나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어떤 기척보다도 통증이 앞섰다. 두피가 당기는 통증에 몸을 일으켰으나 우악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엎어졌다. 하경은 이리 엎어졌다가 다시 저리 엎어지기를 반복했다. 겁에 질려 감은 눈이 이따금 뜨였다. 매 순간 자취방의 다른 풍경들이 담겼다. 옷 무더기, 천장, 싱크대, 신발장, 아예 몸을 돌려 선 엄마가. 

하경은 힘에 이끌려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이 열리고 하경을 좌지우지하던 힘은 그녀를 복도에 내동댕이쳤다. 눈을 뜨니 아빠가 보였다. 아빠의 뒤로는 현관 안으로는 자취방 안에서 짐을 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빠는 하경을 일으켜 안에 태웠다. 그러고는.

“얼른 나와!”

엄마에게 소리쳤다. 

하경의 자취방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집 현관이 열렸다. 남자가 현관 옆으로 부스스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했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아빠는 남자의 볼멘소리를 무시하고.

“대충 싸서 나와! 가게!”

자취방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에게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제야 엄마가 자취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엄마의 손에는 몇 개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빠 차에는 시동이 걸려있었다. 아빠는 뒷좌석 문을 열고 마치 형사처럼, 하경을 구겨 넣듯이 태웠다. 평소라면 조수석에 탔을 엄마가 뒷좌석, 하경의 옆에 앉았다.

퇴근 시간이 진즉에 지났음에도 서울의 도로는 차로 붐볐다. 그 탓에 고속도로에 오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하경은 문득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엄지를 뺀 네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옆통수에 대고 쓸어내렸다.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다시 처음부터. 옆통수에 손을 대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쓸어내리며 손가락 사이사이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했다. 귀 언저리부터 숱이 줄었다. 볼 즘에서 또 한 번 숱이 줄었다. 눈물이 고였다. 턱에 이르러서는 다만 몇 가닥만이 잡혔다. 고인 눈물이 흘렀다. 눈앞으로 손을 가져왔다. 손가락 사이사이에는 제각기 길이가 다른 머리카락들이 집혀 있었다. 그 머리카락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먹을 쥐었다. 옆에 앉은 엄마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쥔 하경의 손 위에 얹었다. 하경은 자기 손 위에 포개진 엄마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 하경이 손을 빼내는 동작이 무심하기도 했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게 가로등이 늘어섰다. 그 아래로 초록색 도로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에는 천안으로 향하는 방향 지시와 남은 거리가 적혀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천안이라는 글자가 생소했다. 차는 달렸다. 천안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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