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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25. 2024

5. 세 번째 편지 (2)


싱크대에서 테이프로 칭칭 감긴 검은 비닐을 굳이 손으로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칼이나 가위를 사용하다가는 검은 비닐 속 어딘가에 있을 각성제가 담긴 비닐 주머니를 잘못 찌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다가 각성제가 새기라도 하면 낭패니까요. 동시에 이성을 잃었을 때 어딘가로 집어 던졌을 칼이나 가위를 찾아 헤매느니 그럴 시간에 손으로 하는 게 더 빠를 것으로 생각했고요. 오산이었습니다. 몇 중으로 감긴 박스 테이프를 제거하는 데 과장을 조금 더 해서 적자면, 반나절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검은 비닐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까 싶어서 얼마나 초조하던지. 

마침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각성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멍청하게도 당시 저는 혼자서 각성제를 손에 넣은 제가 너무나 대견했습니다.

비닐 주머니에 든 각성제를 덜어낼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릇을 찾으려고 싱크대 찬장을 열었습니다. 비어있었습니다. 주방에서 사용하던 가위와 칼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릇이라고 남아 있을 리 없지요. 빠르게 포기했습니다. 투약을 더 지체할 수 없었거든요. 

비닐 주머니에서 각성제 소량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덜어냈습니다. 알약을 마시듯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고 침으로 녹여 삼켰습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증상이 시작되기를 말이지요. 이윽고 익숙한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별장에서 느꼈던 정도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투여량이 부족한가 싶어 결정을 조금 더 덜어내 삼켰습니다. 

투약 후에 제가 어떤 행동을 했을 것 같으세요? 발가벗고 춤을 추었을까요?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웠을까요? 아니면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 주민들을 위협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칼로 제 몸을 난자한다든지, 자해를 했을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자위를 했을 뿐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마약 중독자들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사건을 일으키고는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마약과 극에 등장하는 마약은 다릅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마약 중독자들이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극단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아주 심하게 중독된 소수입니다. 저는 다시 투약함으로써 도리어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자위를 하고 나서 약기운이 떨어질 즘에는 식욕이 돋았습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해 게걸스럽게 입에 넣었습니다. 물론, 폭식의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심지어 돌아온 월요일에는 출근도 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선 저를 바라보는 사원들의 시선은 공허했습니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들의 태도와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의욕적으로 업무에 임하고자 했습니다만, 이틀이나 결근한 탓에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허우적댔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냥 허우적대지 않고 의욕적으로 허우적대었습니다.

결과만 적자면 징계위원회에서 감봉이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휴대전화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다는 변명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반성 그리고 눈물 흘려가며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한 덕에 징계 해고는 면했습니다.

각성제를 혼자 구할 수 있게 되자 J나 별장에서 제 짝이었던 남자에게 선택받아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회사 생활도 입사 당시보다 더 의욕적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업무 효율은 대폭 상승했습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앞에 두었다 한들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퇴근하면 확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확실한 양질의 보상은 이렇게나 사람을 이롭게 하고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온라인으로 주문한 주사기 백 개가 도착했습니다. 경구 투여를 멈추고 정맥 투여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정맥 투여를 직접 하려니, 주삿바늘로 생살을 찌르면 찾아올 고통과 또 그런 과정을 주시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따위 것들이 확실한 보상을 앞에 둔 인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극복한 끝에 주삿바늘은 올바른 곳을 찔렀고 투약 후에는 경구 투여를 할 때와 같은 용량으로도 훨씬 더 큰 자극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약이 정말로 무서운 점은, 이즘 제가 매일 투약을 하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투약을 멈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J의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제가 어땠는지를 아직 기억하면서도 말이지요. 언제든 투약을 멈출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 착각은 투약을 부추겼습니다. 그런 만큼 내성은 빠르게 생겼습니다. 산술적으로 각성제 1그램으로는 서른세 번의 투약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한 달을 투약하고도 사흘을 더 투약할 수 있는 셈인데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약이 동이 났습니다. 맞습니다, 내성이 생김에 따라 투여량과 투약 빈도가 늘었기 때문이었지요. 예정보다 이르게 두 번째 주문을 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히터가 가동을 멈췄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슬슬 반소매를 입고 출근하는 사원들이 있는가 싶더니, 어느덧 사내에는 에어컨이 가동될 정도로 바깥 기온이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저만이 여전히 긴소매 차림이었습니다. 살이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을 수도 없었고 덥다고 소매를 걷을 수도 없었습니다. 주사 자국 때문에. 

내성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그에 비례해 투여량과 투약 빈도도 끝을 모르고 늘었습니다. 왼 팔오금에 주삿바늘 때문에 생긴 피멍이 가실 날이 없어, 왼손으로 주사기를 잡고 오른 팔오금에 투약을 시도했습니다.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해 한 번 투약하는데도 몇 번이나 주삿바늘을 찔러야 했습니다. 그랬던 탓에 투약 횟수가 왼팔보다 현저히 적은 오른 팔오금에는, 금세 왼 팔오금과 같은 정도의 피멍이 들었습니다. 계속하다가는 양쪽 팔오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투약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왜 진즉 떠오르지 않았는지. 별장에서는 몸을 섞는 도중 약효가 떨어지면 정맥 투여가 아닌 다소 독특한 방법으로 투약했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늘을 분리한 주사기에 각성제를 녹인 식염수를 장전한 후 주사기째로 항문에 삽입해 투약하는 것입니다. 자극의 정도는 정맥 투여와 같았습니다. 진즉에 이 방법으로 투약했다면 한여름에 긴소매를 입고 땀을 쏟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했습니다. 

이즘 외모가 바뀐 걸 자각했습니다. 각성제를 자급한 이후로 잡티 한 번 난 적이 없던 얼굴에는 종종 여드름이 돋곤 했습니다. 모양과 크기가 사춘기 때 돋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돋은 여드름은 그대로 흉이 되었고, 그 수가 너무 많아 화장으로 가리기에도 벅찼습니다. 피골이 상접한다는 말은 이 당시 제 모습과 꼭 맞았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약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식욕을 느끼지 못했고 그런 만큼 몸은 말라갔습니다. 얼굴 또한 그랬는데 이마에는 여러 겹의 주름이 자리 잡았고, 볼은 패였고, 눈두덩이 살이 빠지면서,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흰자가 드러났습니다.

이틀간 무단결근을 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저를 향한 사원들의 공허한 시선과 없는 사람 취급하던 태도는 제가 의욕적으로 임한 덕인지 금세 평소와 같아졌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평소보다 좋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봐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외모가 바뀌어 감에 따라 사원들이 말을 거는 횟수가 줄더니, 끝내는 누구도 저와 말을 섞지 않으려 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내에는 저를 두고 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둥,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렸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내용들뿐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몇몇은 마약 투약을 의심할 법도 한데 그런 소문은 돌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실… 모를 일이지요. 투약을 의심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굳이 신고하지 않았던 걸지도.

가계 경제가 기울었습니다. 강해진 내성에 비례해 투여량과 투약 횟수가 늘어난 만큼 각성제를 주문하는 빈도 또한 높아졌습니다. 자꾸 현실의 마약을 극에 등장하는 마약과 비교하게 되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구매자가 중독되어 감에 따라 판매자가 각성제의 가격을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쪽 업계도 경쟁이 치열한 듯 보였으니 고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가격을 인상하기가 쉽지는 않았나 보지요? 나름의 추측일 뿐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겠습니다. 관심도 없었고요. 

저는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을 암호 화폐로 환전해서 판매자에게 송금했습니다. 조건 만남과 별장을 드나들며 모은 돈은 진즉에 동났습니다. 각성제 구매 비용을 제한 월급만으로는 오피스텔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받은 대출 이자와 월세, 관리비, 공과금 등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품 가방과 의류, 드라이어 따위를 헐값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랬음에도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했고 끝내는 집주인에게 오피스텔 퇴실 조치를 통보받았습니다.

미국 어딘가에는, 아마도 슬럼가겠지요? 중독된 창녀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길가를 서성이며 오가는 운전자 또는 보행자를 꾀어 몸을 판다고 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마약을 사는 것이지요. 아, 딱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나 봅니다. 남녀가 후배위로 몸을 섞는 장면이었습니다. 엎드린 여자의 뒤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때리며 즐기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듯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남자가 건넸을 돈을 세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간간이 성의 없는 신음을 냈습니다.

저는 기울은 가계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 슬럼가의 창녀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방치된 조건 만남용 SNS에 쌓인 광고 글이나 잡다한 댓글들을 정리하고 조건 만남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글을 게시했습니다. 나체를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도 다시 올렸습니다. 전과는 다른 비루한 여체가 담긴 사진과 영상은 여자인 제가 보아도 남자들의 욕구를 자극하기에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촬영할 때는 조명을 어둡게 했고 촬영 후에는 꼭 보정을 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구매자가 나타났습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구매 의뢰를 받는 대로 수락했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구매자를 기다렸으나 대부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로부터 그 따위로 장사하지 말라느니, 사진과 영상 보정을 적당히 하라느니 따위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대놓고 망가진 외모를 비하하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숨어있다가 사진, 영상과는 다른 제 외모를 보고 돌아갔을 테지요. 

개중에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일부 남자들은 급을 따지며 가격을 흥정하려고 들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한 푼이 급한 저는 그들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들의 심심풀이 장난이었습니다. 가격 흥정까지 다 해놓고 그들은, 저와 몸을 섞으면 병에 걸릴 것 같다든지,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다리를 벌린다든지 투정하며 비웃음을 두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단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당시 제 수중엔 며칠 분의 각성제와 얼마 전까지는 최신이었지만 이제는 구형이 되어버린 휴대전화, 후줄근한 옷, 그리고 각성제를 주문하기에는 모자란 현금 얼마만이 남았습니다. 남은 각성제를 최대한 아껴서 투약하려고 했습니다만 마음먹은 대로 될 것 같으면 중독자는 없겠지요. 곧 각성제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금단 증상은, 그러니까 장기 투약 후에 겪는 금단 증상은 그동안 겪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 네…. 계속 적어 보겠습니다.

두통이 심했습니다. 머리가 깨진다, 쪼개진다 따위의 표현은 상투적입니다. 정수리에 정을 대고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두통을 잊으려고 잠을 청했습니다. 더 할 수 없는 정도의 나른함은 여전한데 몇 시간을 누워있어도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두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저찌 잠에 들면 오랜 시간 동안 깨지 못했습니다. 잠결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습니다. 대체로 악몽이었고 소리를 지르며 깼습니다. 그러면 꼭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두려워서 그랬는지 화가 나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발작이 멈추고 나서 보면 꼭 무언가 하나씩 부서져 있었습니다. 벽은 금이 가서 움푹 꺼져 있었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미닫이문 유리도 금이 가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난동을 부리다 다쳤는지 몸에는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잃었던 식욕이 식탐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남은 돈으로 혼자 먹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하면 포장도 제대로 뜯지 않고 들어가는 대로 입에 넣었습니다. 속이 받아들이지 못해 구역질이 나면 토사물을 쏟아내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렸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먹기를 반복했습니다. 오피스텔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찌꺼기와 토사물이 썩어 악취가 풍겼고 파리가 어디로 들어와 알을 깠는지 바닥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렸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 중독자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약 중독자가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을 보고 미친 듯이 몸을 긁는 장면입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처음부터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가려운 것이 먼저입니다. 몸이 가려워 긁다가 벌레가 기어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며, 정말로 벌레가 눈에 보이는 순서로 증상이 진행됩니다. 저 또한 몸이 가렵기 시작했습니다. 몸 여기저기에는 발작했을 때 난 상처 외에 손톱에 긁힌 상처가 새로 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환각이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환각을 보게 되는 건 이보다 나중입니다. 

회사요? 그렇네요. 회사 얘기를 적지 않았네요. 그런데 딱히 적을 것이 없습니다. 저는 마지막 각성제가 떨어지기 전부터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저를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이미 전에도 무단결근을 했었던 터라,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 한들 찾으려 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각성제가 고팠습니다. 고파서 혹시나 흘렸을지도 모를 각성제 결정을 찾아 온갖 것들이 즐비한 방안을 기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잊은 돈이 있을까 싶어 모든 옷을 꺼내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가방도 뒤졌습니다. 각성제 결정도 돈도 찾지 못했습니다. 소득은 있었습니다. 돈 나올 구멍을 찾았거든요. 부모님입니다.

전화하기에는 겁이 났습니다. 목소리에 온전치 못한 상태가 묻어날까 봐서요. 전화 대신 백만 원을 송금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보낸 메시지를 엄마가 확인할 때까지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내 메시지를 확인한 엄마가 돈을 요구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일단 송금해 달라, 갚겠다, 나쁜 곳에 쓰려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송금을 주저하는 엄마가 답답해서 화가 치밀었지만 아직은 자제할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송금을 주저했던 엄마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어렵게 입학한 대학교를 휴학하고도 모자라 불륜까지 저질렀던 딸이 갑자기 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딸을 지켜봐 온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 이유가 퍽 의심스러웠을 겁니다. 

저는 끝까지 돈을 요구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엄마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았습니다. 실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서로의 언성이 높아졌고 저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작하고 말았습니다. 휴대전화를 얼굴 앞에 두고 상스러운 욕설과 저주의 말을 뱉어댔습니다. 귀신에 씐 것처럼.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정서의 인과를 물으신들 금단 현상 때문이라는 성의 없는 답변밖에는 달리 답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작이 멎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전화는 끊겨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욕을 한 탓에 숨이 가빴습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온전치 못한 상태를 들키고 만 것입니다. 엄마는 천륜을 거스르고 부모를 저주한 제 만행을 아빠에게 전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아빠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저를 찾으려 들 것이고 가장 먼저 경찰에 도움을 청할 것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이 겁이 난 게 아니라 구속되면 투약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겁났습니다. 각성제를 구할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숨어야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또 아무도 모를 곳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살림을 내다 판 탓에 챙길 것이라고는 옷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아, 주사기도 잊지 않고 챙겼습니다. 가방을 들고 오피스텔을 나와 J와 처음 만났던 지하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역사가 심하게 낙후되었다던, 따라서 주민들의 수준 또한 낙후되었을 것이라고 비하했던 그 지하철역이요. 지상으로 올라와 최대한 후미진 곳을 찾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장통 한구석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3층에 위치한 ‘미림텔’이라는 이름의 고시원에 도달했습니다. 고시원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 환경만큼 안색이 피폐한 아주머니가 홀로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수중의 돈을 다 모으니 십만 원가량 됐습니다. 그 돈을 몽땅 주인아주머니에게 건넸습니다. 돈을 건네는 손이 떨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제 얼굴과 떨고 있는 손을 번갈아 보곤 짧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녀는 돈을 받아 금고에 넣고 계산대에서 나와 저를 지나쳐 앞서 걸었습니다. 저는 뒤따랐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섰습니다.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 잠긴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손짓했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가난의 냄새가 풍겼습니다. 두 평 남짓 될 법한 방의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시멘트가 드러났고 그나마 붙어있는 벽지에는 뭐에 물들었는지 모를 얼룩이 보였습니다.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으니 소름 끼치는 쇠 스프링 소리가 났습니다. 동시에 침대 위에 있던 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이런 방을 내놓고도 주인아주머니는 “사정 딱해 보이니까, 하루 더해서 일주일 분으로 쳐줄게.”라며 장사꾼 특유의 뻔뻔한 생색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어디 갈 데도 없잖아. 받아주지도 않아, 특히 당신 같은 사람들은.”이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습니다.

짐도 정리하지 않고 오피스텔을 관리하던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퇴실 통보를 전했습니다. 부동산 직원은 갑작스러운 퇴실은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습니다. 그는 연체된 월세, 관리비, 공과금과 중개비, 퇴실 청소비 등을 보증금에서 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알겠다고만 답했습니다. 그래야 보증금을 얼마를 돌려받게 되든, 최대한 빠르게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갈무리되는 듯싶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관리인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오피스텔의 처참한 꼴을 확인한 그의 화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냥 두었습니다. 그가 충분히 화를 내도록. 한참 화를 내던 그는 오피스텔 수리비 또한 보증금에서 제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투약을 멈춘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금단 증상은 심해질 뿐,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시트 대신 먼지가 잔뜩 깔린 침대 위에 짐가방을 끌어안고 누워 두통을 견뎠습니다. 그러다가 잠에 들면 오랜 시간 깨지 못했습니다. 잠에서 깰 때는 꼭 오피스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명과 함께 눈을 떴습니다.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가려움증은 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온몸이 미친 듯이 간지러웠는데 참지 못하고 긁어 댄 탓에 몸에는 상처가 늘었습니다. 상처에서는 진물이 흘렀습니다. 그 진물이 마를 틈이 없이 긁어 댔습니다. 손톱 사이에 낀 진물이 누렇게 굳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을 보았습니다. 아, 환각도 환각이지만, 고시원에 기생했던 빈대나 이 같은 진짜 벌레도 있었을 겁니다.

도가 지나친 식탐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앗아갔습니다. 입주 당시 주인아주머니는 라면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말했으나 입주 후 며칠이 지나도 라면을 채워 둔다는 공용 주방의 찬장은 비어있었습니다. 저는 수시로 주방을 염탐했습니다.

아직도 잊지 않습니다. 미림텔 주인아주머니가 라면을 채우는 날은 월요일입니다. 

월요일,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주인아주머니는 투숙객들이 많이 먹는다는 둥, 분명 방에 쟁여놓았을 것이라는 둥 듣는 이 없는 불만을 쏟아 내며 박스에 든 라면을 찬장에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라면을 다 채우고 주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주방이 비었을 때, 몰래 들어가 두 손에 가득 라면을 쥐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생라면을 양손으로 쥐고 들어가는 대로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이가 깨졌습니다. 딱딱한 걸 자꾸 씹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넘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또한 각성제의 부작용 중 하나더군요. 충치와 잇몸 질환, 치아 부식 등이요. 깨진 이의 조각을 고시원 어딘가에 휙 던져두고 다시 라면을 씹었습니다. 시린 이를 참아가면서요.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몸과 정신이 그나마 온전할 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의 의미를 정상인들의 기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무기력, 우울, 울화, 불안, 초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여전하되, 간지러움과 식탐이 평소보다는 덜해 사고를 마비시키는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의 온전입니다. 그럴 때는 부동산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보증금 반환을 독촉했습니다. 부동산 직원은 욕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거의 욕과 다름이 없는 말을 하며 독촉에 반박했습니다.

시간 참 무심하기도 하지요. 잊고 살아도 주어진 사명대로 흐르더군요. 일주일이 지나고 주인아주머니는 제가 부동산 직원을 독촉하는 것처럼 저를 독촉하기 시작했고 독촉은 곧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이 되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와 실랑이가 생길 때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뱉던 금방 돈이 생길 것이라는 말도 약발이 다 하여 더 이상 먹히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 대학교 인근 자취방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보다 못한 저희 부모님은 더 이상 월세를 내주지 않겠다고 통보했었지요. 통보를 받고 며칠 뒤 태성 인터내셔널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요. 인생이 어쩌면 그리 극적인지. 주인아주머니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오피스텔 보증금이 계좌로 반환되었습니다.

은행 놈들이 얼마나 약삭빠른지 알고 계실까요? 제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으나 오피스텔 입주 당시 저는 보증금의 상당 부분을 대출로 메웠습니다. 청년 사업이다, 뭐다 해서 설계된 비교적 이자가 저렴한 대출 상품을 이용했지요. 은행 놈들, 돈을 빌려줄 땐 오피스텔 잔금 치르는 날까지 승인 여부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그 돈을 거둘 땐 집주인이 제 계좌로 보증금을 반환하자마자 홀랑 가져가 버리지 뭐예요? 계좌에 남아 있는 돈은 잔금을 치를 당시 보증금에 보탰던 돈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부동산 직원의 말대로 연체된 월세, 관리비, 공과금과 중개비, 수리비를 제한 금액이었기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얼마가 어떤 사유로 공제된 것인지 확인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저는 곧장 계산대로 가 밀린 숙박비와 앞으로 지낼 한 달 분의 숙박비를 계산하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메신저를 실행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변의가 치밀었습니다. 굳이 화장실에 가지 않았습니다. 참는다고 참았는데 조금 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인간이기는 이미 포기했으니까요. 오랜만에 연락을 받은 판매자가 저를 어찌나 반갑게 맞아 주던지요. 

마약 중독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성제의 품질이지만,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판매자의 빠르고 확실한 일처리입니다. 판매자는 역시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드로퍼가 각성제를 숨긴 곳의 약도와 사진을 보냈습니다. 부리나케 가서 각성제를 찾아 미림텔로 돌아왔습니다.

오피스텔을 떠나올 때 챙겨온 주사기에 각성제를 녹인 물을 장전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내리고 침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렸습니다. 입안에 모은 침을 손에 뱉어 항문에 바른 후 뒤로 손을 뻗어 주사기를 꽂아 넣고 밀대를 밀었습니다. 직장으로 찬 느낌이 퍼졌습니다. 밀대가 더 이상 밀리지 않음을 확인하고 주사기 잡은 손을 놓았습니다. 오랜만의 투약이라 그런지 전보다 빠르게 자극이 찾았습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침대 위에 쓰러졌습니다. 투약 후로 조금씩 숱이 줄어 이제는 듬성한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쾌감을 마주함에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고 입과 코에서는 침과 콧물이 흘렀습니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액체의 느낌이 어느 때보다도 생생했습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 소리를 내며 자극을 즐겼습니다. 아랫도리는 발가벗은 채 항문에는 주사기를 꽂고.

자극이 다 가시기 전에 두 번째 투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또 네 번째. 각성제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동났습니다. 구매를 위해 계좌에 있는 돈을 암호화폐로 환전하려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습니다. 처음으로 이제까지 구매하던 1그램이 아닌 0.5그램을 구매했습니다. 그것은 사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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