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하얀 천장이 보였습니다. 양옆으로는 천장처럼 하얀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커튼을 걷으려고 팔을 뻗는데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링거가 꽂혀있더군요. 병원이었습니다.
또 정신을 잃었나 봅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 옆에 엄마가 보였습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제 이름을 열심히 외치고 있었는데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을 외치고 있다는 건 엄마의 입 모양을 보고 알았습니다. 하얀 배경을 뒤에 두고 입만 뻐끔거리는 엄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만, 꿈이면 어떻고 현실이면 또 어떤가 싶어 이내 분간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었습니다. 전년도 추석을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으니 근 1년 만의 재회였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흐르던지요. 그제야 엄마가 부르고 있는 제 이름이 육성으로 들렸습니다. 유하경, 제 이름이요.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도 금단 증상은 멈추지 않았거든요. 싱거운 병원 밥마저도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습니다. 한입에 머금을 수 없는 음식들을 앞니가 다 빠져 베어 물 수가 없으니, 꾸역꾸역 밀어 넣어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습니다. 천천히 먹어도 된다고 말하며 제 몸에 손을 얹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 위협해 그 손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화장실로 가 속을 게우거나 설사를 했습니다. 붕대가 감긴 몸과 거즈가 잔뜩 붙은 얼굴에는 가려움이 극심했습니다. 마음 놓고 긁고 싶었으나 간호사들과 엄마의 제지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간호사, 엄마와 몸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리는 그들을 뿌리치려고 몸을 흔들다가 링거 바늘이 당겨져 팔에서 뜯겨 나갔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결국 저는 일반 병원에서 닷새를 머물지 못하고 마약 병동으로 쫓겨나듯 이송되었습니다.
마약 병동에 이송되는 날, 병원에 입원하는 것인지 감옥에 수감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구급차에서 내린 제 양팔을 의료진 두 명이 나누어 잡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부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저는 혼자 걷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행위가 도주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구속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습니다. 구속된 상태로 병동에 들어섰습니다. 의료진에게 구속된 저를 다른 한 명의 의료진과 부모님이 뒤따랐습니다. 마약 병동은 삼 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삼 층에 이르니 밖에서 잠기는 철문이 보였습니다. 철문에는 도어록만으로는 부족한지, 무식하게 생긴 자물쇠가 달려있었습니다. 이송 중 내내 흐르던 눈물을 겨우 참아낸 엄마는 철문을 보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적당히 좀 울라며 나무랐습니다. 뒤따르던 의료진이 철문 옆에 달린 인터폰을 들고 “이송 환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소지하고 있던 열쇠로 자물쇠를 풀었습니다. 이윽고 철문 너머로 의료진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그 또한 열쇠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철문 안쪽에도 자물쇠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안쪽의 자물쇠를 푸는 동안 저와 동행한 의료진은 도어록을 해제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병동에 입원 아니, 수감되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이던 때, 병동과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셨는지요? 병동과 의료 인력이 부족했던 그때에도 남녀는 구분해서 격리했었습니다. 코로나에 확진돼 격리된 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아, 확진됐었다는 얘기… 했었던가요? 아무튼 마약 병동에서는 남녀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친해진 의료진에게 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중독자들을 성별 별로 격리해서 수용할 만큼 마약 병동이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의료진 역시 병동과 마찬가지로 항시 부족한 상황이라고 하고요. 그럴 만도 하다고 납득했습니다. 마약 병동의 환자들은 사고나 질병으로 병동에 입원한 이들이 아닙니다. 사지가 멀쩡한 그들은 간헐적으로 이성을 잃고 발작합니다. 발작한 그들을 진정시키는 것은 오롯이 마약 병동 의료진들의 몫이고요. 그 과정은 마치 싸움과도 같습니다. 의료진과 환자의 싸움. 그러나 한쪽에게 굉장히 불리했습니다. 발작한 환자들은 마구잡이로 할퀴고 쥐어뜯고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는 등 폭력을 행사하는 반면 의료진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의료진들은 발작한 환자들에게 맞아가며 그들이 진정될 때까지 잡고 있다가, 진정이 되지 않으면 마지막 수단으로 정체 모를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러면 환자는 금세 잠잠해졌습니다. 주사의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나중의 일입니다. 그렇게 환자를 진정시키고 나면 의료진들의 몸에는 꼭 멍이 들고 긁힌 상처가 남았습니다. 의료진들이 한 건을 해결하고 진이 빠져 돌아가면 다른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고 또는 환자끼리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의료진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투입되었고요. 그러니 의료진들이 마약 병동에 남고 싶어 할 리 없지요.
병동에 입원한 후 삼 일 뒤, 그러니까 미림텔에서 벗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입니다. 형사가 저를 찾아 병동에 왔습니다. 면회실에서 도착하니 덩치가 큰 남자 둘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명은 탁자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의 옆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형사가 그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손짓해, 그리로 가 앉았습니다. 저와 동행한 의료진들이 면회실을 떠나고 취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사들의 취조는 훗날 하게 될 취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고압을 넘어서 위압적이었고 분위기는 엄숙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왠지 취조에 불성실하게 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귀찮은 일을 떠맡은 느낌이었달까요? ‘신고를 받았으니 수사를 하기는 해야 하니까 하는데, 범인 검거는 기대 말아라.’라는 속셈이 은근하게 비쳤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위압적이었던 태도 또한 취조를 빨리 끝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다 보니 저 또한 진술에 성실히 임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술이 아닌, 조금이라도 죄를 줄일 수 있는 진술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지금도 피해를 보고 있는 분들께 또 훗날 제 이야기를 읽을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남깁니다. 형사들은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다녀갔습니다. 형사들이 병동을 드나드는 사이 부모님이 선임한 변호사도 병동을 몇 차례 다녀갔습니다. 이때만큼은 솔직하게 사실에 근거해 진술했습니다.
송장의 모습에서 그나마 사람같이는 보일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을 때, 저는 병동에서 구치소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른 아침 병원에서 호송되어 갈색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기다렸습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금단 증상 때문에 간헐적으로 발작이 일기는 했지만, 그것이 또 다른 사건으로 발전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수감자들 누구도 저와 엮이려 들지 않았거든요. 그들이 저를 두려워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형을 키우고 싶지 않았겠지요. 그뿐이었을 겁니다.
제가 구치소에 수감된 기간은 겨우 하루하고 반나절이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에 간수의 호출이 있었고 포승줄에 묶여 호송차를 타고 법원으로 향했습니다.
법정 들어서니 방청석에 앉아 있는 부모님이 보였습니다. 이윽고 판사가 들어와 자리에 앉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달랐습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언쟁은 온데간데없고 자기들끼리만 웅얼웅얼 말을 주고받더니 금세 끝났습니다. 그나마 들은 몇 마디마저도 법률 용어가 섞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 며칠 동안 대기했습니다. 그리고 판결 선고 기일에 다시 법원을 찾았습니다. 판사는 저를 앞에 두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법원은 저를 피해자로 보고 있었습니다. 미림텔에서 살고자 스스로를 신고한 행동은 자수가 되어있었고요. 마침내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치료 조건부 기소 유예였습니다. J를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 그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읽은 마약을 다룬 기사 속 피해 여성이 선고받은 판결과 같았습니다. 내내 울음을 잘 참아 내던 엄마는 판사가 주문을 욀 때부터 흐느끼기 시작해서 판결이 선고될 땐 오열했습니다. 웬일로 아빠는 오열하는 엄마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 모를 일이지요. 어쩌면 아빠도 흐르는 눈물을 가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도.
법원을 나왔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로 돌아갔거나 교도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올랐을 테지요. 저는 구급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구급차에 오르는 제게 부모님은, 뒤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당신들 차로 향했습니다.
구급차는 저와 두 명의 의료진을 싣고 오랜 시간을 달렸습니다. 차가 멈춘 곳은 재판을 받기 전에 머물렀던 마약 병동이 아니었습니다. 부지 전부가 산에 둘러싸인 그곳은 법원에서 지정한 정신 병원이었습니다. 삼 층 규모의 직육면체 건물이, 규모에 비해 협소한 주차장 너머로 보였습니다. 건물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에 비해 주차장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병원을 찾는 방문객이 적다는 뜻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저와 동승한 의료진 두 명이 일반 병동에서 마약 병동으로 이송될 당시와 같이 제 양팔을 나누어 잡았습니다. 구급차 문이 밖에서 열리고 사이좋은 친구같이 팔짱을 낀 우리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벌써 주차를 마친 부모님이 정신 병원에서 마중 나왔을 의료진들 사이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급차에서 제 양팔을 구속한 의료진들이 저를 정신 병원의 의료진에게 인도하고 다시 구급차에 올랐습니다. 정신 병원의 의료진들은 저를 원내로 이끌었습니다. 부모님이 팔짱 낀 우리를 뒤따랐습니다.
병원 원무과에서 입원 수속을 밟았습니다. 부모님의 면회, 외출, 외박에 대한 질문에 오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원무과장은 그것들이 허락되기 위한 조건들을 설명했습니다. 얼핏 들어도 그가 내건 조건들을 충족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병원의 주차장이 병원의 규모에 비해 협소한 이유를 추측한 것이 적중했습니다.
정신 병원 의료진들은 무자비하고 가혹했습니다. 발작을 일으킨 환자에게 떼로 몰려와 의료행위를 가장한 폭력을 행사했고 폭행한 후에는 환자를 침대에 눕혀 침대에 달린 끈으로 결박했습니다. 또한 재판을 받기 전에 머물렀던 마약 병동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주사를 환자들에게 남용했는데 주사약도 더 강한 성분인 것 같았습니다. 마약 병동에서 주사를 맞은 환자는 비몽사몽일 뿐이었으나 정신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환자는 영화 속 좀비처럼 침을 흘리며 정체 모를 신음을 냈습니다. 그것이 신음이 아니라 말을 하려고 하는데 언어 능력이 상실되어 신음처럼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제가 주사를 맞고 나서 알 수 있었습니다. 주사 후에 환자들을 결박했던 끈을 풀면 그들은 바닥을 기었습니다. 정신 병원 내에서 주사는, 코끼리도 마비시킨다는 뜻으로 코끼리 주사로 통했습니다.
이런 무자비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제 상태는 호전되었습니다. 발작 빈도가 현저하게 줄었고 그런 만큼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의료진들의 생활 지도도 문제없이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입원 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저는 퇴원 조치를 받았습니다. 물론, 조건부였습니다. 거주지 인근 병원으로 정기적으로 통원해 혈중 마약 농도를 꾸준히 검사받아야 했습니다.
돌고 돌아 참으로 오랜만에 천안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가를 찾았던 전년도 추석, 그때와 뭐 하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본가에서 딱 하루를 지내고 깨달았습니다. 정신 병원에서 상태가 호전되었던 것은 그와 같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작이 다시 잦아졌습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때 발작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빠가 출근한 후 발작할 때였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난동 부리는 저를 두고 방으로 피신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사고가 났습니다.
아빠가 막 출근한 이른 오전, 저는 발작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엄마는 방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식칼로 제 손목을 그었습니다. 제가 잠잠해지자 방문을 연 엄마는 피 고인 주방을 마주했습니다.
눈을 떴을 땐 통원하던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엄마가 침대 옆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저도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 나 다시 병원으로 보내 줘.”
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입원하든 수감되든 그래야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길로 병원을 알아봤습니다. 검색해 보니 마약 병동은 전국에 21개소가 있었습니다. 그 병동 모두가 늘어가는 중독자들을 수용하기에 벅차 예약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설 요양원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요양원도 중독자인 저를 꺼렸습니다. 다행히 인천에 중독자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요양원이 있어 그곳에 입원해 치료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마약 병동이나 정신 병원보다 한결 생활하기가 편했습니다. 남녀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요양 보호사들도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서 새해를 맞았습니다. 2023년 12월 31일 자정, 입소자들은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종소리를 들으며 저는 소원을 빌었습니다. 첫째로 금단 증상이 조금이라도, 그 정도가 아주 티끌만큼일지라도 잦아들게 해 달라고. 둘째로 제가 그토록 찬양하던 J, 그가 제가 느낀 고통의 반만큼이라도 느끼게 해 달라고. 그리고 죽여 달라고.
2024년 1월 1일. 새해가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과 겹쳤습니다. 새해부터 주말 동안은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있으면 치료 후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엄마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변화. 1월 말에 우리가 만났지요. 주말마다 삼 주 동안. 예정된 취재를 끝까지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본가로 돌아온 2월의 금요일 밤 또다시 발작이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이 잠에 든 사이 시작된 발작은 끝내 상해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요양원에서 돌아오는 주말이면 엄마는 칼이나 날카로운 물건들을 다른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 방에 있던 커터 칼은 미처 생각지 못했나 봅니다. 발작한 제 눈에 커터 칼이 들었고 이번에는 제 자신이 아닌, 저를 말리는 아빠의 팔을 칼로 그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적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빠 팔에 난 상처는 크지 않았습니다. 발작이 멈추고 엄마와 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울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아빠는 저를 차에 태우고 인천 요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다음 날 예정된 마지막 취재에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혹 약속 장소에서 오래 기다리셨을까요? 그렇지 않으셨더라도 죄송합니다. 이렇게라도 사과를 드리니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낸 기분이네요.
지금도 저는 여전히 금단의 고통에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금단 증상은 심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고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할 때도 있습니다.
언젠가 증상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그만둔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저의 또 다른 그림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닥의 그림자가 걸레질한다고 닦이던가요?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길어지고 줄어들며 평생을 함께하겠지요. 금단 증상 또한 어떤 치료를 받더라도 평생을 함께할 테고요. 모든 일이 저의 판단과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한들 지금에 이르러서는 남은 평생이 참으로 아득할 따름입니다.
정신 병원에서 코끼리 주사를 맞고 좀비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중독이라는 것은 깎아 놓은 사과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갈변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요. 투약 초기에 투약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투약을 멈출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착각은 투약을 부추기고 어느 날 문득 투약자는 마주합니다. 갈변한 사과처럼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갈변의 시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듯이 투약자 또한 언제부터 중독되었는지 정확히 짚을 수가 없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J를 처음 만난 날, 그 한 번으로 중독이 되었는지, 별장에 드나들며 중독이 되었는지, 오피스텔에서 각성제를 직접 구매했을 때부터 중독이 되었는지 언제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습니다. 아, 모를 일이지만 스무 살 한여름 밤, 기형적인 오르가슴을 처음 느꼈던 그때부터였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 갈변한 사과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한 번 중독된 투약자 또한 중독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요. 저 역시 중견기업 주임 유하경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본인을 소개하셨지요? 그때 건네주신 명함에 적힌 주소를 검색해 봤습니다. 출판사는커녕 지방 신문사가 검색되더군요. 어떤 의도로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차라리 잘 됐습니다. 편지에 명함 하나를 동봉해 보냅니다.
별장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몇 번째 방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 J는 집중하지 못하고 허둥댔습니다. 묻는 말에 엉뚱한 답을 할 정도로요. 뭐가 그리 바쁜지 운전도 난폭했고요.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장거리를 이동할 예정이면서 연료조차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나 보지요? 가까운 주유소로 향했습니다. 셀프 주유소였기에 J가 차에서 내려 직접 주유해야 했습니다. 차 안에 홀로 남은 저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뒷좌석에 아무렇게 놓인, 그가 평소 들고 다니던 손가방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열어 보았는데 각성제는 보이지 않더군요. 대신 가방 안, 명함 지갑에 든 명함 몇 장을 챙겨두었습니다.
J의 가방에 있던 명함이지만, 명함의 주인이 J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괜히 연락했다가 J가 받으면 미움을 살 테고 그러면 예정된 호출에서 배제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거든요. 자력으로 각성제를 구할 수 있게 된 후로는 필요 없어졌고요.
명함을 동봉하는 이유가 기자님께서 J의 실체를 세상에 밝히고 처벌해 주길 바라기 때문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런 일은 기자는 당연하고, 심지어 경찰이나 검찰도 아닌 오직 하늘의 몫이니까.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생각하시어 제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하는 증거 정도로만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취재 당시 망가진 제 몸 상태를 보셨으니 허실을 따지는 의심은 털끝만큼도 하고 계시지 않겠지만.
제 이야기를 토대로 적으실 글이 소설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아니라 기자시니까 아무래도 소설은 아니겠군요. 그렇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제 이야기가 담긴 글이 부디 세상에 나기를 바랍니다. 유혹받고 있는, 이미 투약하고 있는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유혹을 뿌리치거나 투약을 멈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는 이런 저를 보고 중독자 주제에 위선이나 떤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님 또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요. 그러나 저로서는 이 일을 사명으로 알고 행했습니다. 그런 의도가 고스란히, 온전히 전해지기를 또한 바랍니다.
이로써 제 갈변의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이 편지가 기자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네요. 후련합니다. 저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금단의 고통에 허우적대며 살아가겠지요? 괜찮습니다. 이미 체념했으니까. 아, 발작은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좋겠네요. 요양원에서 퇴소하면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글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