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TV 프로그램. 패널인 셰프들이 게스트를 위한 요리를 만들고 나면 내가 그 요리를 가장 먼저 시식하고 요리에 어울리는 커피나 음료를 즉석에서 만들어 요리를 의뢰한 게스트에게 낸다. 이제는 ‘바리스타’하면 사람들은 ‘상우’를 떠올린다. 요식업계에 백종원이 있다면 음료, 커피 업계에서는 ‘상우’가 있겠다. 어느 날 녹화를 마치고 백종원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다. 수요 미식회 골목식당 등 자신이 몸담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음료 파트를 담당해 줄 수 있겠냐는 요청이었다. 흔쾌히 수락했다.
친구의 결혼식에 Jeep 사의 하얀색 랭글러를 타고 등장한다. 담배를 태우러 식장 밖으로 나와있는 친구들은 차체가 높은 랭글러의 조수석에서 내리는 여자 친구를 잡아주는 나를 보고 있다. 하나 둘 차로 다가와 ‘언제 샀냐.’ ‘연비는 얼마나 되냐.’ ‘출고가는 얼마나 되냐.’ ‘내가 자동차 딜러인 거 몰랐냐. 왜 나한테 얘기 안 하고 다른 새끼한테 샀냐.’ '이 씨입빨르마 너 정말 실망이다.' 따위의 말들을 지껄인다. 나중에 얘기하자며 친구들을 뒤로하고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이제는 프리랜서다 보니 쉬는 날이 많아졌다. 일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프리랜서로 전향하고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이다. 반려견인 사모예드 ‘규식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평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소홀했던 운동을 즐긴다. ‘규식이’와 산책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복싱장으로 향한다.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인근에 거주하는 지인들을 불러 마당에 설치해 둔 바비큐장에서 참나무 숯에 고기를 굽는다. 파티가 끝나면 기분 좋게 취해 잠에 든다.
따위의 꿈이 있었다. 나는 움직였다. 나름대로 치밀했고 나름대로 진지했다. 그러나 10년간 몸담아온 커피라는 것은 몸담고 있는 우리들만의 리그였다. 런닝맨으로 유명한 배우 전소민 씨가 언젠가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다. “커피요? 한 달 배우면 할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누구나 한 달만 투자해도 필드에서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10년 동안 외면해 왔다. 길을 잘못 들었다.
랭글러와 마당이 딸린 주택 그리고 반려견 ‘규식이’.
임인년 새해가 밝자마자 재직 중인 회사에서는 작년 4개월 동안의 감봉에 이어 또 감봉에 들어갔다. 이 시국 모두가 힘들겠지만 실수령 200도 안되는 내게는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내 나이 서른셋. 한 달에 200만 원도 벌 능력이 안되는 서른셋. 당장 몇 만 원이 아쉬운 서른셋.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처지에 Jeep 사의 랭글러와 반려견 ‘규식이’가 웬 말인가. 명절 당일,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 오랜만에 치킨을 시켰다. 항상 먹던 브랜드의 치킨 가격이 또 인상되었다. 배달비도 같이. 단돈 몇천 원이 아쉬워 다른 브랜드의 저렴한 치킨을 시켰는데 꼴에 입맛은 고급이라고 반도 넘게 남겼다. 올해 11월 나는 전셋집을 재계약해야 한다. 2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세입자가 원한다면 법적으로 내후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임대인이 다시 들어와 산다고 얘기하면 나는 집을 비워야 한다. 그러면 나는 갈 곳이 없다. 당장 1억도 안되는 돈으로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하기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하늘에서 별따기나 다름이 없다. 삼십 대에 들어서며 어째선지 아침에 쾌변이 힘들어졌고 똥을 싸고 몸을 비틀어 휴지로 똥구멍을 닦을 때 옆구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토요일 단 하루 술자리를 갖지만 주량은 점점 줄어들어 소주 한 병을 채 비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숙취는 전과 다를 바 없이 꾸준하게 찾아온다. 이제 슬슬 암이 걱정되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한 갑씩 피워대는 담배를 끊을 자신이 없다. 이십대의 로망이었던 능력 있는 미중년은커녕 찌질하고 냄새나는 의지박약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프로 데뷔 후 무려 37연승에 19 연속 KO라는 전적으로 일약 복싱 스타가 된 헤비급 복서 MIC 타이슨이 말했다. 내게도 꿈이 있었고 이루기 위한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계획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노오력만 하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줄 알았다. 태생적으로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와 그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뻔한 이야기를 적겠다.
많이들 말한다. “사람 사는거 다 똑같다." 사람 사는거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해 보기라도 하듯 뻔한 이야기를 적어 나가 보겠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찌질하고 궁상맞은 그러나 부끄러워 함구했던 이야기들을 내가 총대 메고 적어 보겠다.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 우리 삼류들이여. 여기를 보라. 이곳에 그대들이 찾는 진짜 공감이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