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우 Oct 21. 2022

그 후...

에필로그

요란한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이불 속을 뒤적여 잠들기 전, 충전기를 꽂아둔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오전 7시 30분.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이불은 못 본 체하고 싱크대 앞에 섰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여전히 무지막지한 10L짜리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라 마시고 1층 흡연장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 내리는 비가 한없이 얄궂다. 습도는 또 어찌나 높은지 벌써 몸이 끈적하다. 흡연장 의자에 앉아 원룸 앞 골목길을 바라보니 바쁜 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반대로 언덕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은 없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저들 틈에 섞여 출근했었다.


상경한 둘째 날. 알딸딸하게 취해 흡연장에 내려와 담배를 입에 물고 부디 호주에서 했던 피 말리는 게임이 서울에서만큼은 재현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때 우려했던 대로 나는 상경한 지 네 달 만에 두 곳의 직장을 때려치웠다. 어쩌면 그날의 나는 직감으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3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열었다. 못 본 체 지나쳤던 흐트러진 이불이 나를 반겼다. 그 꼴이 아니꼬워 친히 정리해 주고 전기밥솥을 열었다. 장시간 보온으로 굳어버린 누런 밥. 주걱으로 딱딱한 밥 덩어리를 꾹꾹 눌러 반으로 갈라 한 덩이 밥그릇에 담았다. 그 위에 간장과 참기름을 부어 이번엔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부숴가며 비볐다. 백수로 지낸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양의 간장과 참기름을 삼켰을까. 직장을 때려치우고 얼마간은 계란 프라이도 곁들였었지만 봤다 하면 떨어지는 면접을 거듭한 지금은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있을 만큼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처참하다.


데드라인은 이번 달까지로 정했다. 7월 안에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면 나는 짧았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천안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때문에 이 달이 지나면 직장을 구하든 못 구하든 어쨌든 간장밥과는 이별이다.


입안에서 혀 컨트롤을 잘못해 딱딱한 밥알이 왼쪽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또 치통이 찾아왔다. 두 달 전 마트에서 산 싸구려 소고기를 씹던 중 찾아온 왼쪽 위 어금니 치통.


호주에 가기 전 어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보험 설계사에게 치과 보험을 들어뒀었다. 현재로선 치료할 돈이 없으니 일단 신용 카드로 치료비를 결제하고 치료를 받은 후 보험금을 청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여, 설계사에게 문의하니, 그는 계약 한 일로부터 2년을 채우지 못했기에 보험금을 내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때 설계사가 아닌 보험사에 문의했어야 했다.


한쪽으로만 씹는 통에 밥 한 주걱 먹는 시간이 한 세월이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더 여유를 부릴 수 없다. 남은 간장밥을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원룸 건물 앞 언덕길을 내려오는 그 짧은 새 이마에는 벌써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갖춰 보겠다고 입은 색 바랜 파란 셔츠의 겨드랑이도 이미 축축했고 아크릴 혼방 싸구려 슬랙스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총체적으로 불쾌하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길 찾기 앱으로 정류장 위치와 타야 할 버스 번호를 찾아 캡처해두었다. 다시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사진 앱을 열었다. 사진 앱 상단에 유명한 음료 브랜드의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이 보였다. 동생이 쓸 일 없다고 보내준 것을 저장해두고 잊고 있었다. 좋다. 커피를 들고 버스를 탈 수는 없으니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 먹자. 아이스로. 찬 것을 입에 머금으면 상한 이가 시리기야 하겠지만 공짜 커피니까 참을 수 있다. 정 안되겠으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마시는 방법도 있다.


길 건너에 정류장을 두고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쪽이 먼저 바뀔까. 이 더위에 다음 버스 기다리기 싫은데… 보행자 신호가 먼저 초록불로 바뀌었다. 이 또한 좋다.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찜통더위에는 오히려 딱 맞춰 도착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버스가 내 앞에 서자마자 헐레벌떡 올랐다. 에어컨이 차게 식힌 버스 내부에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승객도 거의 없어 자리도 널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스 뒷문과 가장 가까운 이인용 의자도 비어있었다. 그리로 가 앉았다. 서울에서는 버스에 오를 때 한 번, 내릴 때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태그 해야 하지만 천안에서는 버스에 오를 때 한 번만 태그 한다. 내가 지금 앉은 이 자리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상경하고 생겼다. 이 자리에 앉으면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일어나지 않고 미리 교통카드를 태그 할 수 있다.


잊고 있던 공짜 커피를 찾았다. 버스의 직진 신호보다 보행자 신호가 먼저 바뀌었다. 버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비어있었다. 비야 뭐… 짜증은 나지만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아무래도 오늘 하루 시작이 좋다. 어째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경기도 양주로 향했다.


그런데 잠깐만… 김첨지도 운이 좋았었는데…!



이전 15화 나가믄 김치찌개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