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화.
오전 8시. 핸드폰으로 확인한 최고기온은 영상 10도. 아쉽게도 아침 기온은 아직 그에 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오늘도 코가 시렸다. 핸드폰 상태 표시줄에 떠있는 쿠팡 아이콘을 보고 현관을 열었다. 어제 주문한 전기장판과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던 냉동 닭 가슴살, 믹서기가 보였다. 말 그대로 ‘로켓 배송’이었다. 업체에서 제시하는 가격만큼 상품을 주문하면 하루 만에 배송해 준다는 그 혜택을 병천에서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것 자체가 특권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사소한 경우를 두고 뱉은 말은 아닐 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혜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건을 만족해도 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또한 전자만의 특권 아닐까.
배송된 닭 가슴살을 웍에 담아 삶기 시작했다. 상경 전, 연예인 김종국 씨가 운동이 끝난 후에 닭 가슴살을 갈아 마시는 걸 유튜브로 본 적이 있다. 아침 식사로 참 괜찮겠다고 생각해 친구들에게 꼭 해보리라 포부를 밝히듯 말했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었다.
“야, 그거 내가 해봤거든? 와… 무슨 토한 거 다시 마시는 거 같아가지고 다 버렸잖어?”
그럼에도 사내들이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깨닫지 못하는 법. 아직 닭가슴살이 익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앞서 배송된 믹서 용기를 세척해 그 안에 어머니가 챙겨주신 미숫가루와 본가에서 먹던 딸기맛 프로틴을 담아 두었다.
다 익은 닭 가슴살 한 덩어리를 핑크와 베이지색 가루가 뒤섞여 담겨있는 믹서 용기에 채워 넣고 남은 것들은 냉장 보관할 요량으로 통에 옮겨 담아 싱크대 한편에 식게 두었다. 언젠가 뜨거운 것을 바로 냉장고에 넣으면 음식도 변질되고 냉장고에도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변질된 음식을 먹고 몸이 고생하는 거야 뭐, 대수겠냐만 냉장고가 고장 나 돈이 나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담은 재료들이 다 잠길 때까지 물을 넣고 믹서기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옆에 서서 내용물이 많아 버거워하는 믹서기를 응원했다.
곱게 갈려 핑크색 죽이 된 그것을 입에 머금자 실 같은 닭가슴살 건더기가 씹혔다. 닭 비린내가 조금 올라왔으나 프로틴의 딸기향과 고소한 미숫가루 향이 더 진해 친구의 말처럼 역하지는 않았다.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단백질도 보충할 수 있다. 그냥 마시면 되니 먹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설거지도 간단하다. 무엇보다 밥을 먹었을 때보다 속이 편했다. 눈 뜨자마자 바쁜 현대인의 아침 식사로 더할 나위가 없다. 역시 해보길 잘했다. 별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철저하고 까다롭게 자기 관리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착각에서 비롯된 뿌듯함은 덤이라 적겠다. 품었던 자취 로망 중 하나를 만족스럽게 실현하고 계획했던 대로 헬스장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앞서 나는 다년간의 헬스 경력을 자랑하듯 적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헬스장을 등록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이유인 즉 병천 본가에 언젠가 동생이 사 두었던 벤치프레스가 있었고 독립할 때 그것을 자취방으로 옮겼다. 때문에 천안에선 헬스장을 등록할 필요가 없었다.
호주에서 돌아와서는 병천에 있는 대학교 부속 헬스장을 이용했었다. 여느 부속 헬스장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인도, 트레이너도 없었기에 자취방에서 운동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인생 첫 헬스장 등록은 호주에서.
멜버른에 도착한 날, 게스트 하우스에 짐만 놓아두고 헬스장으로 향하던 그때를 회상해 보면 참 겁이 없었다.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헬스장 직원과 대화가 어려울 것이 분명했고, 호주 헬스장의 운영 방침을 전혀 몰랐음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이틀에 걸친 긴 여정 때문에 꾸준히 지켜오던 운동 계획이 틀어질까 초조했을 뿐.
호주에서도 그렇게 뻔뻔했던 나인데 모국에서 헬스장을 등록하려고 하니, 뭐랄까… 오히려 조금 위축됐다고 할까, 겁이 났다고 할까. 다녔던 면접을 제외하면 서울을 겪어본 적이 없다. 아, 십 년 전, 스무 살 때 잠깐 서울에 살며 모델 학교를 다녔던 적이 있긴 하구나. 아무튼 서울이라면 괜히 비쌀 것 같고. 서울이라면 괜히 다를 것 같고. 서울이니까. 서울에서는. 그랬다. 누군가는 서울을 꿈꾸며 환상을 품는다고 하지만 나는 서울이 두려웠다.
평일 오전 연신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로 꽉 찼다. ‘조금 높은 건물과 지하철역이 있다 뿐이지 시장이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님들이 오다니시니 이게 병천과 다를 바가 무어냐!’라고 최면을 걸어가며 그 안에 자신감을 채웠다.
가장 먼저 방문했던 헬스장을 잊지 못한다. 병천에서 드나들던 대학교의 헬스장과는 입구부터 그 기운이 달랐다. 분명 찾아올 때 본 건물 외관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내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어차피 비쌀 거 다른 곳부터 들러볼까 잠시 고민했더랬다.
하지만 나는 칼을 뽑아 든 촌놈. 무라도 썰어야 했다. 영어로 'Information'이라 적힌 안내 데스크 앞에 섰다. 입꼬리만 올린 전형적인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인사를 건네는 여직원, 비싸 보이는 운동복을 갖춰 입었다. 화장기 짙은 얼굴이 복장과 사뭇 대조되었다. 내 말과 태도에서 촌내(촌 냄새.)가 풍길까 되려 당당하게 가격을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세 달 결제하시면 할인해서 45만 원입니다.”
세 달에 45만 원이라… 비싸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갖춰진 시설이라면 여느 30대들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가격일 테다. 하지만 여느 삼십 대가 아닌 미완성 삼십 대에겐…
“헤헤… 역시 그렇네요. 헤헤… 더 돌아보고 올게요. 헤헤.”
난처할 때 나오는 촌놈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보다는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그리고 무어라 이어 말하는 여자를 뒤로하고 그 길로 내뺐다. 아니, ‘더 돌아보고 올게요.’라고 하면 될 것을 ‘역시 그렇네요.’가 웬 말인가. 아마도 가격을 듣고 먹통이 돼버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무의식이 되려 ‘서울이라면 당연히 비싸겠지.’라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뱉어낸 것이라 이제 와 추측해본다.
첫 번째 방문부터 촌발 제대로 날렸다. 호주 헬스장에선 세 달에 한화 15만 원 정도를 지불했었다. 그런데 서울 헬스장의 가격은 그 세배에 달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하필 비싼 곳을 첫 번째로 방문한 것이리라. 분명 보다 저렴하고 적당한 시설을 갖춘 곳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 두 번째 방문을 하기 전에 인근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언젠가 명준에게 들었던 그의 일화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때는 스무 살 초반, 일회용 교통카드가 처음 보급됐을 무렵. 명준은 상경한 성진을 만나기 위해 큰 맘을 먹었더랬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서울에서 성진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지하철 이용이 불가피했다. 역 안에서 매표소를 찾았으나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그는 안내소에 문의, 역무원의 도움으로 일회용 교통카드 판매 기계 앞에 줄을 설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차례가 됐고 처음 보는 기계 앞에서 먹통이 돼버린 명준. 그저 역무원과 기계의 화면을 번갈아 바라볼 뿐.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역무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툭 던진 한 마디.
“아, 하세요.”
그 말에 이 버튼 저 버튼을 눌러 댔으나 당연히 교통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의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 그리고 들려오는 이하이가 부릅니다. 누군가의 한숨. 결국 보다 못한 역무원이 또 한 번 그를 도왔다. 명준은 기계가 뱉어낸 카드를 손에 쥐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 자릴 내뺐다. 썰을 풀던 명준은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아오, 씨바꺼. 촌발 지대루 날리고 왔잖어~”
당시 그의 처지와 가격을 듣고 헬스장에서 도망쳐 나온 내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또 한 번 웃었다.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두 번째 헬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돌아보고 올게요.’라는 문장을 속으로 연신 읊었다.
연신내에 있는 헬스장들을 방문하며 회원제로 운영되는 개인 pt 숍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았다. 헬스장인 줄 알고 찾은 곳들이 대부분 개인 pt 숍이었다. 일반 헬스장과 다른 점이라면 개인 pt 숍은 정액제가 아닌 회당 가격을 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격대가 더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등록한 회원 모두를 1:1로 지도하며 기구 사용방법부터 자세, 나아가 운동 계획까지 관리해 준다. 고 인터넷에 적혀있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이 글에서 너무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어디까지나 이 글의 장르는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넋두리에 가깝지만.)일 테니.
결국 내가 고른 헬스장은 집에서 약 10분 거리. 귀에 꽂은 유선 이어폰을 통해 전자음의 안내를 받았음에도 수 번을 헤매가며 도착한 건물은 작고 낡았다. 그야말로 초라했다. 과연 나는 속물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작고, 낡고, 초라한 건물을 보니 솔직히 마음이 편했다. 만만하게 느껴진 것이리라. 건물만큼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오르니 자동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카운터가 있었고 약 20평 되는 작은 공간에 꾸역꾸역 들여놓은 기구들이 보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며 물었다.
“아, 헬스장 알아보고 있는데요. 관장님이세요?”
“예, 제가 관장입니다. 혹시 실내화 가져오셨나요?”
“아뇨.”
“그러면 잠깐 신발 벗어 두시고 들어오셔서 둘러보세요.”
신발을 벗고 헬스장에 들어서는 찰나, 관장님이 퍽 기분 좋은 얘기를 뱉었다.
“그런데 어디… 다른데 트레이너세요?”
의도는 칭찬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영업장을 지키기 위한 견제에 가까웠을 테다. 그러나 그간 다른 사람들이 건넸던 어떤 칭찬들보다 전문가의 조심스러운 견제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는 벤치 프레스, 스쾃, 데드리프트로 구성된 3대 운동을 다룰 수 있는 최대 무게로 들며 훈련하는 ‘파워 리프팅’을 즐겼다. 때문에 가장 먼저 파워 랙(3대 운동과 나아가 밀리터리 프레스와 바벨 로우를 포함한 5대 운동까지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만능 기구를 말한다.)과 스쾃 랙(파워 랙과 달리 수행할 수 있는 운동이 스쾃, 밀리터리 프레스, 바벨 로우 정도로 한정적이다.)의 대 수를 파악했다. 파워 랙이 무려 세 대, 스쾃 랙은 두 대가 있었다. 역시 헬스장 건물처럼 낡았지만 사용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호주에서 다니던 헬스장은 6대의 파워 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보니 날을 잘못 잡거나 줄을 잘못 서면 하루 운동을 공치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오늘 방문했던 헬스장들은 많아야 두 대 정도의 파워 랙을 보유하고 있었다.
플레이트를 모아둔 곳으로 눈을 돌리니 유난히 작은 플레이트 하나가 보였다. 여느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1.25kg 플레이트였다. 세상, 더할 나위가 없다. 파워 리프팅의 목표라 함은 쉽게 말해 다룰 수 있는 무게의 증량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헬스장들은 플레이트를 2.5kg부터 구비해 둔다. 말인 즉, 바벨 운동을 할 경우 최소 증량 단위가 5kg이라는 것. 하지만 바벨 양쪽에 꼽은 플레이트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증량 폭은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언젠가는 최소 증량 단위인 5kg 증량조차 버거워질 것이고 그때 1.25kg 플레이트가 있다면 2.5kg씩 증량해가며 보다 세분화되고 효과적인 증량을 꾀할 수 있다. 여느 헬스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이템인지라 대부분 개인적으로 구매해 들고 다닌다. 혹시나 주변에 파워리프팅을 즐긴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가방을 뒤져보라. 한구석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1.25kg 플레이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려 다섯 대의 랙과 1.25kg 플레이트까지 구비해 둔 것으로 보아 관장님이 회원들의 파워 리프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액권 가격만 맞는다면 등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시 카운터로 가 세 달 정액권 가격을 물었다.
“원래는 15만 원인데요. 지금은 이벤트 기간이라 14만 원에 해드려요.”
“등록할게요. 오늘부터 운동 바로 가능할까요?”
“아… 가능은 하신데 실내화가…”
“아, 맞다. 예… 없는데…”
“에이, 그냥 오늘은 물티슈 드릴 테니까 신발 밑창만 닦고 이용하시죠. 다음부터 가지고 오시면 될 것 같아요.”
낡을 대로 낡은 헬스장의 그야말로 ‘old school.’ 감성에 취해 즐기는 운동은 나쁘지 않았다. 운동 중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헬스계의 대부, 고중량 고반복 루틴의 창시자 ‘로니(미국의 보디빌더. 로니 콜먼.)’ 형님처럼 웃통을 벗어젖히고 ‘Light weight baby!(로니 콜먼은 운동 시작 전, 해당 문장을 외치며 자기 암시를 건다.)’를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상우 씨. 홍카 매니저입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는 걸로 스케줄 짰습니다.’
홍카의 매니저였다. 이어서 스케줄이 작성된 엑셀 파일이 업로드됐다. 직원들의 이름이 써져있고 교차 근무를 고려한 출근 지점과 오픈, 마감 근무가 일별로 적혀있었다. 내 첫 근무는 성호라는 직원과 홍카 본점 오픈 근무로 편성되어 있었다. 매니저는 ‘근무복은 흰 셔츠나 검은색 셔츠 가져오시면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네. 알겠습니다.’라고 짧은 메시지로 답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