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분명히 시간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흘러 하루를 보내지만
그 시간 위에 서 있는 나는 멈춰있다.
시간을 보낼 의지가 있는가 하면, 없다. 그렇다고 멈출 의지가 있는가 하면, 무섭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잘못을 고치면 나아질까.
내가 받아온 상처들을 다 회복하면 나아질까.
...
아님 상처를 준 사람으로부터 일일이 사과를 들으면 나아질까. 이젠 뭐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모르겠다.
하도 일기를 쓰며 되돌아보니 삶이 다 아프다.
모든 것들이 다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럴 때 최선이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거라면 나는 언제까지 멈춰있기만 하는 걸까. 이렇게 무수한 물음표들이 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기도 한다. 그렇게 가만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
물론 그러니까 환자이지만 말이다.
우울, 공황, 불안장애가 발현된 건 중고등학생 때부터이다.
새로운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녀왔다. 4년 만이다. 병원을 다니는 초기에 5번에 거쳐 한 병원에 정착했다.
그 병원에서 4년 동안 치료받았다.
상담치료 또한 병행했다. 상담은 대학시절 2018년도부터 학교에서 받기 시작했다. 내게 우울증 치료에 있어서 상담의 비중이 매우 컸다. 하지만 작년 백수가 된 이후로는 경제적 문제로 인해 상담을 중단했다.
8년 만에 상담이 사라졌다.
사실 4년을 다닌 병원 의사 선생님과 소통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내가 상태가 안 좋아서 그렇구나 했고 한편으로는 어차피 상담 선생님이랑만 통하면 되니까라고 생각해서 그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약은 잘 맞는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니 괜찮았다. 하지만 8년 만에 사라진 상담의 빈자리를 의사소통이 되지 않던 병원의사 선생님으로 대체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선생님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았고 마지막 의사 선생님의 말은 나에게 상처만 되어 버렸다. 별로 고민하지 않은 끝에 병원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 병원은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전화예약을 한 후로 2주 뒤에 진료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병원에 4년 만에 초진을 하러 갔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초진은 좀 오래 걸리는 편이다. 환자의 과거도 알아야 하고 현재 상태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병원에서 온 환자라고 하더라도 그냥 똑같은 약을 검사도 안 하고 쓰지는 않는다. 중간에 약이 없어서 급히 들린 병원도 진료는 하는 편이다. 나를 우울증 환자 경력 7년 차 (대충 그렇다고 치자), 가서 할 말들을 정리하고 메모장에 기록도 했다. 근데 히스토리를 다 말할 생각을 하니 내가 그날의 모든 진료시간을 다 잡아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고민하다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물어보고 정리하겠지라고 결론지었다. 뭐 이상한 말하고, 주어 서술어 다 안 맞아도 알아서 의사 선생님이 해석하겠지에서 나의 고민은 끝났다.
문제는 고민이 하나 더 생겼다.
만약에 이번에 가는 의사 선생님도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고 무슨 선택을 해야 할까였다. 이젠 병원 옮기고 초진 하는 것도 지친 상태였다.
남의 말 한마디에 세상을 등질 생각은 없지만 이번에 가는 병원 의사 선생님 마저 '인생은 원래 그런 거예요'이런 타령을 하면 나는 좀 많이 지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병원을 다니면서 나는 매일 일기를 써왔다. 실은 일기라기보다는 그냥 그때의 내 생각, 마음 상태를 두서없이 쓴 글이다. 내용은 다 똑같다.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
앞으로는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만 나를 고칠까.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매일 성찰하는 일기를 썼을까 싶다. 내가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그래서 낫지 않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