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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Jan 24. 2022

글을 못 쓴 이유

양쌤의 another story 4

  앗!

  겨우 두 모금 마신 라지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때려 엎었다. 

  몇 년 전 삼성동 카페에서 망고 빙수를 엎은 적이 있긴 하지만 사고의 책임은 누가 봐도 빗살무늬토기처럼 생긴 빙수 그릇의 몫이 절대적이었다. 테이블에 내려서자마자 “어서옵쇼~” 하는 것처럼 노란 망고를 둘둘둘 쏟아내며 큰절을 냅다 해버리는데 말릴 틈이 없었다. 그때는 친구들이랑 숨넘어가게 웃었었는데 이건 뭐 웃기지도 않고 반경 1m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거의 가득 차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 아이스요~”하며 사방으로 얼음덩어리를 날려 보냈다. 존재감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스카프를 안 하고 있길 다행이지 얼떨결에 그걸로 닦았을지도 모른다.

  “저, 커피를 쏟았는데 좀 치워주셔야 할 것 같아요.” 유리컵이 아닌 데다가 일행도 없고 옆 테이블도 비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노트북과 핸드폰도 무사했다. 냅킨을 한 뭉텅이 가져와서 의자와 테이블을 정신없이 그러나 별일 아닌 척 닦는데 눈이 참 예쁜 아르바이트생이 물티슈를 갖고 왔다. ‘아이고, 물티슈라니.’ 수습 불가임을 깨달은 아르바이트생은 물티슈를 건네주고 되돌아갔다. 눈치 빠른 사장님은 벌써 밀대를 들고 와 저만치 서 있었다. 사장님의 손에서 행주와 밀대를 받아 쥔 아르바이트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행주로 테이블 위에 커피와 얼음을 수습하는데 얼음덩어리가 활짝 웃는 상어 마우스패드로 튀어 올랐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제가 더 죄송해요)” 

  “얼음이라도 더 갖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냥 하나 더 사 먹을게요.” 

  내가 앉은 의자는 인조가죽인데 맞은편 의자는 왜 하필 패브릭 의자인 거야? 겨우 세 페이지 읽은 새 책에도 흔적을 남겼다. 치우면서 사고 친 게 미안해 이 카페를 계속 올 것인지, 흔적이 남은 의자를 보기가 민망해서 앞으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것인지 생각했다. 4,600원 커피값이 마시지도 못했는데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카페에서 노트북으로는 문서작업만 했는데 오늘따라 노트북을 와이파이에 연결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32%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휴대폰은 충전기를 꽂긴 했는데 멀티탭을 켜지 않았고 노트북은 충전하는 걸 깜빡했다. 무겁다고 투덜거리면서 노트북 충전기는 가방에 넣었는데 무겁지도 않은 휴대폰 충전기는 멀티탭에 꽂아놓고 그냥 왔다.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려고 노트북 와이파이를 켜고 카* 로그인을 한 것이 사단이었다. ‘그새 안 읽은 카*이 이렇게 많네’ 쭉쭉 내리며 확인을 하는데… ‘어? 2주나 지났는데 내가 이 카*을 안 읽었다고? 답장을 보낸 것 같은데 이상하네’ 휴대폰으로 확인하겠다고 손을 뻗는 순간! 큰 사고든 작은 사고든 사고는 찰나다. 마침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읽지 않은 카*을 보는 순간 뇌와 손이 엉겨버린 걸까? 아주 시원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때려눕혔다.


  커피를 차마 한 잔 더 주문하지는 못하고 찬물만 들이켜는데 그 문제의 카*을 보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밉다 밉다 하니까 이렇게도 미운 짓을 하는군. 오늘은 곰곰이 생각해 볼 게 있었단 말이지. 점심도 포기하고 텅 빈 위장을 카페인으로 채우며 진지하게 글을 써 보려 했다고! 사실 뭐 꼭 그 사람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시스템 문제였을 수도 있어. 어쨌든 기분이 안 좋아, 안 좋아~! 

  하, 글을 못 쓸 핑계는 날마다 늘어만 간다. 오늘 할당된 나의 카페인은 패브릭 의자와 밀대와 행주와 냅킨이 죄다 먹어버리고 심술만 남았다. 

  이것저것 마우스만 눌러대는데 물만 출렁이는 위장에서 아주 커다란 신호를 보냈다. 밥값 같은 케이크 한 조각을 사 먹느냐, 창밖으로 보이는 냉면집에 가서 겨자를 팍 짜 넣은 물냉면을 먹느냐. 아무래도 나는, 보기에 좋은 음식보단 가성비 좋은 게 최고이고 먹으면 배도 부른 게 좋다. 미련 없이 가방을 쌌다. 냉면집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 그릇째 들고 육수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배부르니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어쩌다 커피를 엎고 산만해진 머릿속 탓에 글을 못 썼다기보다 텅 빈 위장으로는 글쓰기가 안되었던 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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