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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Jan 27. 2023

길치, 운전하다

양쌤의 another story 30

  15년 만에 장롱면허를 탈출하고 운전을 시작했을 때, 나는 아는 곳이든 모르는 곳이든 무조건 내비게이션을 켜서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든 남편이나 지인의 차량으로든 너무나 자주 다녔던 곳이지만 커다란 쇳덩어리를 나와 한 몸처럼 부려서 도로 위를 달리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초보운전 시절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거리에 대한 감이 없어서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놓칠 때가 많았다. 더구나 길눈이 어두운 나는 초행길일 때면 내비게이션이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재수정해서 외쳐대기 바빴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했지만, 진입로를 계속 놓치다가 내비게이션과 함께 U턴의 함정에 빠져 버리곤 했다. ‘주인 잘못 만나 네가 고생이 많다.’ 내비게이션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모자란 주인 같으니라고.      

  

  그래서 처음 가는 길일 때는 사전 준비를 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경로를 파악하고 주차할 곳도 찾아보았다. 그런 준비가 무색하게 길을 헤맬 때도 있었다. 가는 길만 검색하고 오는 길은 검색을 안 해봤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 본다. 웃기는 변명이지만 사실이다. 갈 때는 잘 갔는데 돌아올 때는 길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갔던 길로 다시 오면 되는 그게 나는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바로 옆에 붙은 광명시에 갔다가 안양시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가산 디지털단지에 가 있다거나 고속도로를 타고 아주 멀리 갈 뻔했던 적이 있었다면 길치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려나 몰라.     

 

친정가는 길

  드라이버로서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300km쯤 떨어져 있는 친정집을 혼자 운전해서 다녀오는 것이다. 한번은 정말 큰마음을 먹고 친정까지 운전한 적이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남편은 걱정이 되는지 “어깨 힘 빼. 팔도 힘 좀 빼.” “너 그러다 병나겠다.” “내가 할까?” 틈만 나면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보니 그동안 혼자 고생시킨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더 미안했다. 

 햇빛 때문에 눈부시다며 마스크를 눈에 쓰고 자버리거나 “난 빗소리 들으며 차 타고 가다 잠드는 게 너무 좋아. 진정한 드라이브지.” “악~ 너무 삐딱하게 잤나 봐. 목이 안 펴져!” 이런 말이나 하는 마누라를 구박하지 않고 귀엽게 봐주는 남편이 있으니 내가 친정 가는 길을 아직도 더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거리 운전을 도맡아 하는 남편을 위해 나도 나름 도움이 되려고 애쓰긴 한다. 너무 하찮아서 그렇지. “졸리면 참지 말고 휴게소에서 좀 자고 가자” “00 휴게소까지만 내가 운전할게” “난 자기가 졸리지 않게 열심히 떠들어 줄게”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너무 졸려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느껴지지만 절대 안 잔 척하기, 이런저런 노래를 틀어주고 간식 먹여주기, 아주 급한 문자 대신 보내주기 같은 것들.


  고속도로가 운전하기 더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운전이 어려운 게 아니다. 길눈이 어두운 게 문제인 거다. 시내에서야 길을 놓치면 쉽게 U턴이나 P턴을 할 수 있지만, 고속도로에서 IC나 JC를 놓치면 일이 커진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며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은 신박하지만 나에겐 필요악이나 마찬가지다. 

  운전하는 걸 보면 배짱 좋아 보인다고 누가 그러던데 사실 간은 콩알만 하다. 게다가 길치이니 웬만하면 운전대를 잡고 시(市) 경계를 넘어가지 않았다. 이십 년을 넘게 산 이 도시만은 나에게 안전지대다. 

  이런 길치에게 가장 운전하기 편한 길은 어떤 길일까? 8차선 넓은 도로도, 한밤중 텅 빈 도로도 아니다. 바로 익숙한 길이다. 어디쯤 속도위반 카메라가 있는지, 어느 차선이 직진과 좌회전이 다 가능한지, 어디쯤 갑자기 차선이 없어지는지, 우회도로가 어디 있는지, 상습 정체 구간이 어디인지 다 알고 있는 길. 익숙한 길을 운전할 때는 캄캄한 밤 아무리 비가 쏟아져 차선 하나 보이지 않아도 두렵지 않다.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도 괜찮다.      

사진 픽사베이

  이 도시가 고향보다 더 익숙해진데다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운전을 했더니 제법 ‘드라이브의 맛’을 알게 되었다. 경치 좋은 교외의 드라이브 코스는 아니지만 익숙한 길을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운전하다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편안하게 운전하다가 가끔은 충동적으로 낯선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낯선 길이라지만 별로 당황스럽지 않다. 나의 홈그라운드니까. 나는 길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며 느긋하게 운전을 즐기게 된다.

 이제는 이웃한 도시들로 큰 부담 없이 나들이를 가기도 한다. 한 가지 출발 전제조건이라면 길눈 밝은 동승자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운전하며 동승자와 수다 떠는 여유를 부리다 P턴을 몇 번씩 한 적도 있긴 하지만 운전이 좀 재미있는 것 같다. 이런, 길치가 운전하는 재미를 알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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