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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Aug 02. 2022

마주 보다

양쌤의 another story 19

  ‘강릉 35km’ 표지판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비를 예고했던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화창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구름으로 꽉 찼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 빗줄기가 극성스럽게 꽂히는 여름 바다를 보겠구나 싶었다. 슬그머니 선글라스를 내렸다. 구름뿐만 아니라 안개까지 나서서 반겨주었다. 곧 도로 위 하얀 선과 앞차의 비상등 외엔 다 가려졌다. 안개가 신경을 곤두서게 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곤하게 자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1박 2일 짧은 휴가 내내 비가 오더라도 비 오는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잔뜩 안개 낀 대관령을 굼뜨게 내려와 만난 바다는 수묵화 같았다. 눈부신 푸른빛이 아니라 먹물을 연하게 풀어놓은 듯한 색을 품고 바다와 구름이 맞대어 있었다. 먹구름은 수평선 가까이 내려앉고 파도는 부표를 뿌리치고 내 발치로 빠르게 몰려왔다. 밀도 높은 구름은 무뚝뚝하게 자리를 지키고 그 위로 늘어선 성긴 구름은 바쁘게 걸어갔다. 거센 바람으로 바다는 일정하지 않으나 촘촘한 주름을 짓고, 머리카락은 짠내 섞인 끈끈한 바람과 같은 편이 되어 휘날렸다. 바다와 마주 선 나는 물안개에 젖어 들었다.

  발 정도만 담근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옷이 젖더라도 조금 더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려 했다. 하지만 높은 파도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안전요원의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얼른 마음을 접었다. 대신 젖은 발로 모래를 헤치며 비 오기 전 바다를 따라 걸었다. 말없이 오래 함께 걸어도 불편하지 않은 가족이 옆에 있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성수기를 막 지난 바다는 아주 쓸쓸하지도 아주 수선스럽지도 않았다. 내일의 날씨도 내일의 바다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두꺼운 유리창에 숨겨졌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했지만, 듬성듬성 하늘이 보였다. 부지런한 남편은 해돋이를 볼 날씨도 아닌데 일찌감치 산책하러 나갔다. 호텔 발코니에 나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왼쪽은 경포호가 오른쪽엔 경포해변이 길게 늘어섰다. 텅 비었던 해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음의 짐들은 여름 바다에 모두 풀어놓고 후련한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로비로 나갔다. 동해를 향해 난 큰 창 앞에서 다시 바다와 마주했다. 바다를 살짝 가리는 것은 저 아래에서부터 자라 올라온 소나무뿐이다. 시원한 인공의 바람 속에서 창 저쪽 후덥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과 바다와 하늘을 보았다. 땀 흘리지 않는 소나무와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래를 움직이는 파도, 구름에 가려졌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해. 강릉의 8월은 이렇게 기억되었다.

  지나간 겨울과 가을 그리고 여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듯 다른 풍경을 만났다. 앉은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없다고 했지만 같은 풍경도 새로워 보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마음의 풍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다도 소나무도 변함이 없는데 헤매는 마음 탓에 풍경은 계절과 상관없이 봄빛이 되기도 가을빛이 되기도 한다. 이때의 풍경은, 흔들림 없는 그대로의 평화로운 여름빛이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자 바다는 원래의 푸른빛을 회복했다. 구름이 물러가고 해가 존재감을 드러낸 덕이다. 구름 빛 바다만 보고 가나 했는데 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바다의 빛깔을 보여줬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달콤한 쇼콜라 무스 타르트를 먹으며 바다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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