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잃고 혼자였던 언니는, 동생을 잃고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던 우리 가족 옆에 있었다. 얼마 후 언니는 결혼했다. 아빠가 그때는 40대 초반이어서 50대셨던 나의 큰아버지가 언니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했다. 몸이 약했던 언니는 고생 끝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유치원에 보낼 때쯤이었다. 엄마가 호적에 올리지는 않지만 언니를 진짜 언니로, 진짜 가족으로 함께 하면 어떠냐고 물으셨다. 별 고민 없이 그러자고 했다. 새삼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오랫동안 생각을 하셨다 했다. 언니도 혼자니까 가족이 되면 언니도 나도 외롭지 않고 얼마나 좋겠냐며, 언니와 형부라면 끝까지 네 편이 돼줄 거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이 돌아가신 후 혼자 남게 될 딸에게 친정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이후로 나는 여덟 살 차이 나는 우리 엄마를 꼭 장모님이라고 부르는 더없이 든든한 형부가 생겼고, 조카가 둘 생겼고, 마흔셋에는 벌써 이모할머니가 되었다. 언니는 친정엄마와 아버지, 제부, 두 조카가 생겼다.
우리는 명절을 함께 보내고 집안 대소사를 함께 챙긴다. 나보다 부모님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니는 형부와 함께 자주 친정에 가서 부족한 것과 필요한 것을 살핀다. 가까운 거리라고 하기엔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인데다가 마음이 없으면 그리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엄마는 누가 식당 하느냐고 물어볼 만큼 김장을 많이 하시는데 언니와 형부는 그 연례행사에 빠진 적이 없다. 나는? 나는 사실 작년에 처음으로 참석했는데 아빠가 손 수술을 하지 않으셨으면 안 갔을지도 모르겠다.
7월 중순, 여름의 한 가운데인 내 생일날이면 택배가 도착한다. ‘두구두구두구~’ 상자를 열어볼 때의 기대감은 한 번도 배신당하지 않았다. 언니가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바느질한 세상에 하나뿐인 퀼트 가방이 짜잔 하고 나타난다.
촌스러운 것 같아 처음엔 별로인 듯했는데 어느새 색이 바래도록 들고 다닌 꽃가방, 모서리가 닳고 가죽 끈도 교체할 만큼 시도 때도 없이 들고 다닌 버버리 천 토트백과 크로스백, 수업할 그림책 넣어 다니라고 만들어준 빨간 머리 앤 가방, 어깨도 아프고 무거운 가죽 가방 싫다 하니 작지만 별거 다 들어가는 귀여운 가방 등등
우리 언니가 만들었어요
“어 예쁘다. 이 가방 뭐야?”
“우리 언니가 생일 선물로 만들어줬어.”
“언니가 있었어?”
“응. 언니가 있지. 음… 말하자면 길지만 언니가 있어.”
내가 퀼트 가방을 들고 있으면 으레 언니가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고, 가방보다 만들어준 언니의 존재를 더 궁금해하는 친구가 있다.
너무 예쁘다고 주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지만 언니는 싫다고 했다. 팔기 시작하면 즐겁게 못 만들고 힘든 일이 돼 버린다고. 만들고 싶을 때 만드는 게 좋다고.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하고 기동성, 추진력, 깡, 오지랖이 다 되다 보니 늘 바쁜데도 내 생일만큼은 정성을 다해 선물을 챙긴다. 언니에게 눈 나빠지고 힘드니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생일이 다가오면 또 기대하게 된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되며 가족 모두의 인생이 풍성해졌다. 명절날 조용했을 집에 언니네 가족들이 고스란히 들어오며 시끌벅적 고향집의 풍경이 완성되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조카 덕에 추석 때마다 가족사진을 찍는다. 화장은 고사하고 세수나 했으면 다행인 얼굴에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나 앞치마를 입은 채로 빨강 분홍 슬리퍼를 신고 모두 활짝 웃는 얼굴로 마당에서 찍은 사진 속엔 행복한 가족의 삶이 보인다. 4대 17명이 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다. 언니는 나와 키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아픈 데도 비슷하다. 우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고 최씨 성을 가진 착한 남편도 만났다. 부부의 연만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의 탄생도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멀리 떨어져 1년에 2~3번밖에 보지 못하지만,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우리는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