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봄의 초대장
바람은 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결을 달리했다. 도서관 앞 벚나무들이 서로의 가지를 스치며 작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잎눈이 터져 나온 꽃잎들이 하늘 위로 가볍게 풀려 퍼졌다가, 빛을 머금은 채 천천히 내려앉았다. 햇살에 부서지는 꽃잎의 궤적은 순간마다 새로웠다.
윤희는 걸음을 늦추고 잠시 그 풍경 속에 멈춰 섰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의 홈을 두 번 툭 치며 지나갔다. 그 짧은 규칙적인 소리가 이상하게도 심장박동과 딱 맞았다. 봄은 늘 이런 방식으로 돌아왔다. 호흡이 얕아지고, 손끝이 먼저 기억을 떠올렸다. 계절은 기억을 붙잡는 손잡이 같았다.
올해 그녀는 쉰둘이었다. 교직을 내려놓은 지 반년. 하루의 형태는 단순했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 토스트가 튀어나오는 소리, 남편이 현관문을 닫는 소리. 문이 닫히고 나면 집안의 모든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벽시계 초침이 또렷하게 들렸고, 냉장고의 컴프레서가 진동하며 돌아갔다. 창틀을 스치는 바람조차 규칙적인 음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아이들은 이미 독립했고, 주말에 간헐적으로 오는 전화가 가족의 안부를 이어주었다. 거실은 지나치게 넓었다. 침묵은 잘 마른 천처럼 가벼워 보였지만, 막상 걷어 올리면 묵직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 도서관 벚꽃길을 떠올렸다. 거기서는 공백이 덜했고, 시간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오늘도 그녀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얇고 단단한 종이가 걸음마다 가볍게 찢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안에는 오래된 노트 한 권과 얇은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표지는 닳아 번들거렸고, 모서리는 무뎠다. 학창 시절부터 붙잡아 온 습관 같은 물건이었다. 봄의 길목마다 꺼내어 확인하고, 다시 덮고, 또 끼워 넣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길은 변한 게 없네.”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말이 바람 속에 퍼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계단 위쪽에서 아이 둘이 깔깔거리며 내려왔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 주었다.
“가만히 있어. 하나만 더.”
익숙한 발음의 리듬이었다. 오래전, 교정에서 누군가의 호흡과 나란히 걷던 때와 겹쳤다. 윤희는 그 장면을 귀로 먼저 떠올렸다. 문예반 발표회가 끝나고, 복도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 위 꽃잎을 떼어 주던 손. 이름을 부르면 웃음으로 먼저 대답하던 얼굴.
그 얼굴은 자주 흐렸다. 너무 선명하면 일상이 불편해진다는 걸, 몸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일까, 그녀는 오히려 흐린 선을 더 잘 기억했다. 어쩌면 기억은 선명함보다 망설임 쪽에 더 오래 머문다. 그녀는 현관 난간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래 닦인 나무결이 손금 사이를 흘러갔다. 나무와 옻, 햇살이 섞인 온기가 손끝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유리문을 밀자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어깨를 감싸며 다가왔다. 책 냄새가 길게 깔렸다. 먼지와 햇살이 층층이 겹쳐 서가 사이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안내 데스크를 지나, 습관처럼 오른편 ‘수필’ 서가로 향했다. 책등들을 손끝으로 쓸며 걷다가 쇼핑백에서 노트를 꺼냈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섬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누렇게 변한 페이지 위에는 연필 자국이 살아 있었다. 친구들의 짧은 낙서, 장난스러운 벚꽃 그림들.
가운데쯤, 여백 위에 똑 떨어진 한 문장이 있었다.
“언젠가 다시, 봄이 오면.”
삐뚤지만 힘이 있는 선. 누구의 글씨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이 여백을 쓰다듬었다. 그 문장은 초대장처럼 서 있었다. 봉인을 열라고,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읽으라고. 오랜만에 그 문장을 마주한 순간, 가슴 안쪽이 묘하게 저려왔다.
그녀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빛이 책상 가장자리에 경첩처럼 걸려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얕게 흔들렸다. 희끗한 머리칼, 눈가의 잔금들. 그런데도 눈빛은 낯설지 않았다. 오래 숨어 있던 불씨가 바람을 받은 듯 미약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 말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의 형태였다.
옆 서가 쪽에서 발자국이 났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속도. 그림자가 모서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윤희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귀만 남아 그 발소리를 붙잡았다가 놓았다. 창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종이를 넘겼다. 꽃잎 몇 장이 실내로 흘러 들어왔다. 책상 위와 바닥, 의자 다리 근처에 조용히 쌓였다.
그녀는 꽃잎 하나를 집어 손톱으로 펴서 살폈다. 잎맥이 연하고 물기가 남아 있었다.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다. 안내 방송이 흘렀다.
“오후 두 시부터 어린이 낭독회가 있습니다.”
숫자와 명사들이 유연하게 이어졌다. 마음속 어딘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노트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봉투 하나가 페이지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얇은 종이, 옆면이 반쯤 터져 있었다. 그 속에는 발표회 프로그램이 들어 있었다. 오른쪽 아래 작은 활자. 사회: 김준호. 이름 위에 손가락을 얹는 순간, 세월에 묻혔던 리듬이 되살아났다.
프로그램 뒤쪽에는 급히 적은 메모가 있었다. ‘끝나고 도서관 뒤 벤치.’ 둥근 점 두 개가 마침표처럼 찍혀 있었다. 그날의 빛은 맑았고, 바람은 온화했지만, 그녀는 그 벤치로 가지 못했다. 사소한 부탁이 겹쳤고, 수업이 길어졌고, 누군가의 질문이 이어졌다. 돌아섰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놓침은 대개 그렇게 왔다. 큰 소리 없이, 그러나 또렷하게. 이후 그녀는 그 벤치를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가까이 가면 약속이 소리를 낼 것 같아서, 일부러 멀리서만.
“실례합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팔에 책 두 권을 끼고, 조심스럽게 서 있는 몸짓. 눈매가 익숙했다. 웃을 때 오른쪽 눈꼬리가 먼저 접히는 습관.
“혹시… 윤희?”
질문표를 달았지만, 확신의 온도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살짝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표지에는 피아노 건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가 말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그녀가 짧게 웃었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보는 게 오랜만이네.”
그는 창밖을 보았다. 꽃잎 하나가 유리창에 붙었다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멀지 않아. 병원에서 일해. 점심시간에 가끔 들러. 아무래도, 여기가 마음이 가라앉아.”
옛날에도 그는 중요한 말을 앞에 두면 음이 반 톤 낮아졌다. 그녀는 그 습관을 기억했다.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그 습관이 기억을 오래 묶어둔 건 분명했다.
“그 쇼핑백, 혹시 그때 노트?”
그녀는 노트를 그의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는 표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웃음이 잠깐 스쳤다.
“이 촉감. 발표회 프로그램… 아직 가지고 있네.”
그녀는 봉투를 뒤집어 보였다. 흐릿한 인주 도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날, 벤치… 혹시—”
“못 갔지.”
그녀가 말했다.
“이유를 만들면 끝이 없어. 그날의 나는 변명을 골랐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갔었어. 오래 앉아 있었지. 누가 지나갈 때마다 네가 아닌지 두 번씩 확인했어. 이상하게 그 이후론 네 이름을 쉽게 말할 수 없더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린아이 몇 명이 책을 끌어안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발소리가 통통 튀었다. 그 소리가 사라진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뒤쪽 카페 갈래? 창가에 고목 보이는 자리.”
그 제안은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자는 제안과 닮아 있었다. 윤희는 잠시 노트를 보았다.
“언젠가 다시, 봄이 오면.”
글씨가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좋아.”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의 ‘좋아’는 서두르지 않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가 책을 반납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테이블 위 꽃잎을 손바닥으로 모았다가, 한 번 불어 흩었다. 돌아온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아까 네가 한 말, 마음에 들었거든.”
“어떤 말?”
“여기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말.”
그녀가 웃었다.
“물속에 가라앉는 게 아니라, 바닥을 찾아 앉는 쪽으로.”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펜을 꺼냈다.
“한 문장만 같이 쓸래? 오늘 우리가 쓸 수 있는 문장 하나.”
그녀는 노트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가 다시 밀었다.
“써.”
그는 적었다.
“우리는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오늘의 빛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그 밑에 덧붙였다.
“길이 어디로 나든, 오늘은 함께.”
안내 방송이 다시 흘렀다.
“두 시 정각, 어린이 낭독회가 시작됩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모였다. 윤희는 책상 위 꽃잎 더미를 보았다. 작은 산을 손끝으로 무너뜨렸다. 꽃잎이 종이처럼 흩어졌다.
“갈까?”
그가 물었다.
“응.”
그녀가 노트를 쇼핑백에 넣었다. 쇼핑백이 얇은 소리를 냈다. 문장 끝에 달린 온점의 소리처럼.
두 사람은 나란히 현관으로 걸었다. 유리문에 역광이 걸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얇게 겹쳤다. 문을 밀자 바깥 공기가 넓게 펼쳐졌다. 계단 위로 꽃잎이 얕게 쌓여 있었다. 발끝이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기억나?”
그녀가 말했다.
“발표회 끝나고, 여기 난간에 기대서, 너는 말수를 줄였고, 나는 불필요한 말을 늘였던 거.”
“그때 넌 말이 많았지.”
“지금은?”
“지금은 필요한 만큼.”
대답의 길이가 봄 햇살과 닮았다. 길지 않아서 좋았고, 짧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은 골목 모퉁이에서 잠깐 멈췄다.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의 흐름이 교차했다. 윤희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방금 복사한 대여함 번호였다.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내 번호 바뀌었어. 보내둘게.”
문자 알림이 떴다. 그녀는 그 숫자를 천천히 읽었다. 숫자 사이에 오늘의 냄새가 끼어 있었다.
“가볼게.”
그가 손을 들었다.
낮은 인사.
“오늘 고마워.”
“나도. 오늘을 같이 써줘서.”
그는 골목 끝으로 작아졌다. 그녀는 그 방향을 바라보다 반대쪽으로 걸었다. 하늘은 조금 더 맑아졌다. 벚꽃은 여전히 흩어졌다. 흩어짐 속에서 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그녀는 그 사이를 느린 속도로 통과했다. 어깨 위에 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정적이 맞았다. 그러나 아침과 달리 정적의 밀도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노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표지를 쓸었다. 오늘의 문장이 안에 들어 있었다. 연필로 날짜를 적었다. 네 개의 숫자와 점 두 개가 오늘을 박았다.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갔지? 내일, 같은 시간, 도서관 앞.’
그녀는 확인 표시만 눌렀다. 확인은 말보다 오래 남았다.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끓는 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머그컵에 차를 부었다. 향이 올라왔다. 창밖 복도등이 켜졌다. 벚꽃은 어둠 속에서 색을 잃고 모양만 남았다. 윤희는 차를 들고 창가에 기대 섰다. 낮의 장면이 거꾸로 재생되었다. 계단, 유리문, 안내 방송, 어린이 목소리, 창가의 고목, 수프의 온도, 그의 손끝, 꽃잎. 장면과 장면 사이에 오늘의 문장이 끼워져 있었다.
“오늘의 빛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말은 공중에 가볍게 떠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려앉는 자리에 밤이 피어났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꽃잎이 안쪽에서 흩어졌다. 바깥과 안이 겹쳤다. 겹침은 안정을 만들었다. 오늘의 빛이 천천히 가라앉는 동안, 그녀는 내일의 문장을 떠올렸다.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온기와 향기와 숨. 그리고 생각했다. 봄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옮겨앉는 것이라고. 사람의 어깨에서 사람의 어깨로, 오래된 노트에서 오늘의 여백으로. 그렇게 옮겨앉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잠시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