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봄날의 동창회 (1)
봄 햇살이 호텔 연회장의 유리창을 스치며 바닥 위로 반짝이는 조각을 흩뿌렸다. 창가의 얇은 커튼은 바람이 들 때마다 물결처럼 흔들렸다. 둥근 테이블마다 흰 천이 팽팽히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에 유리잔은 정연하게 놓였다. 포크와 나이프는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나란히 줄을 맞추었고, 종업원은 지나치며 의자의 각도를 살짝 바로잡았다. 무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배우들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듯했다.
영숙은 입구 근처에서 잠시 멈춰 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가지런히 넘기고, 살구빛 원피스 위에 얇은 차콜색 재킷을 걸쳤다. 손에는 작은 클러치를 꼭 쥐었다. 오랜만의 외출, 오랜만의 자리가 그녀의 어깨를 조금 무겁게 했다.
“동창회”라는 단어가 던지는 울림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그녀가 외면했던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실어 나르는 듯했다. 오늘은 잊힌 이름들이 다시 불릴지도 모른다. 그 이름 속에 감춰둔 감정까지도 함께 따라 나오지 않을까, 두려움과 설렘이 엇갈렸다.
“어머, 영숙이 아니야?”
등 뒤에서 울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단발머리에 진주 목걸이를 한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진이었다. 대학 시절 같은 문예반에서 함께 글을 읽고 토론하던 친구. 여전히 눈매가 밝았고, 입꼬리에는 따뜻한 버릇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진아.”
영숙의 목소리는 순간 젊은 날의 높이를 닮았다. 두 사람은 반가움에 서둘러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의 잔잔한 굳은살, 손등의 옅은 주름마저도 세월이 남긴 증표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대로네.”
“그대로는 무슨, 나도 변했지. 거울 잘 안 보지?”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젊은 시절 문예반 방의 공기가 잠시 스며드는 듯했다. 잃어버린 문 하나가 다시 열리듯,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이 번졌다.
연회장 안쪽 스크린에서는 졸업 당시 사진이 느린 속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운동장 단체 사진, 도서관 앞 모임, 발표회 무대 위의 낯빛. 화면 속 흑백에 가까운 빛깔이 지금의 얼굴과 겹쳐졌다.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그 기억의 파편들을 바라봤다.
“저 날 기억나? 네가 낭독했던 발표회.”
수진이 화면 속 흰 블라우스 차림의 소녀를 가리켰다. 두 손으로 원고를 꼭 쥐고 있던 영숙의 옛 모습이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구나.”
“태연한 척이 아니고, 진짜 태연했어. 다들 놀랐어.”
둘은 소리 내 웃었다. 웃음은 잠깐 이어지다 잦아들었고, 잦아든 자리에는 묘한 여운이 흘렀다. 기억이란 그렇게 불쑥 되살아나, 현재를 흔들었다.
잠시 후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오늘은 특별히 오랜만에 뵙는 자리니, 건배로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종업원이 잔마다 와인을 채우자 붉은빛이 유리 안에서 번졌다. 영숙은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얇은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오래 묻어 둔 약속을 다시 쥔 듯했다.
“위하여!”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작은 종소리가 터져 나왔다. 잔들이 부딪히며 파편처럼 흩어진 웃음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와인의 향이 공기 속에 퍼졌다. 영숙은 잔을 입술에 대고 잠시 멈췄다. 향이 코끝에 머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이름이 피어올랐다. 준호. 문예반 활동 내내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던 사람. 초대 명단에서 본 이름이 떠올랐다. 과연 그는 오늘 여기에 올까.
옆자리에서 동창 하나가 말을 건넸다.
“영숙, 우리 같이 연극 보러 갔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대사 잊어서 객석이 웃음바다가 됐던 날 말이지?”
둘은 크게 웃었지만, 영숙의 시선은 어느새 문 쪽에 고정돼 있었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살짝 스며들었고, 그 바람에 테이블 위 꽃장식의 작은 봄꽃잎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얼굴은 모두 낯익으면서도 엇갈린 기억들뿐. 영숙은 와인잔 끝을 가볍게 두드렸다. 금속성의 울림이 손끝에서 퍼졌다.
그때 수진이 팔꿈치로 그녀를 살짝 찔렀다.
“저기… 혹시.”
영숙의 시선이 문으로 향한 순간, 심장이 갑자기 가볍게 멎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입구에 서 있었다. 머리칼에는 은빛이 스쳤고, 눈가의 주름이 세월을 드러냈지만, 단정한 윤곽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준호였다.
그는 연회장을 잠시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영숙은 와인잔을 들었으나 입술은 닿지 못했다. 잔 속의 와인이 흔들리며 붉은 빛을 흩뿌렸다. 수진의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맴돌았다.
“역시 왔구나. 가서 인사하지 그래.”
영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클러치를 조금 더 세게 쥐며 손끝으로 떨림을 누르고 있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이 발목을 잡아,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준호가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걸어왔다. 회색 정장의 단정한 선이 걸음마다 반듯하게 드러났고, 은빛이 섞인 머리칼은 조명을 받아 은근히 빛났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오랜 세월을 넘어온 망설임이 배어 있었다. 영숙은 숨을 고르듯 잔을 내려놓았다. 클러치를 쥔 손가락이 여전히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이 준호의 걸음을 따라갔다.
“영숙… 맞지?”
준호가 테이블 앞에 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나, 오래전과 같은 울림이 스며 있었다.
영숙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래, 준호. 정말 오랜만이네.”
그 짧은 인사만으로도 연회장의 소음이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맞닿는 순간, 그 사이에는 지나온 세월이 층층이 포개졌다. 도서관 복도에서 마주쳤던 날들, 원고를 들고 토론하던 밤들, 봄비 속 우산을 함께 쓰던 장면이 파도처럼 겹쳐졌다.
수진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나섰다.
“둘이 이렇게 다시 보니까, 내가 다 이상하다. 문예반 회장님이랑 낭독회 스타였던 사람들인데.”
“스타라니.”
영숙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준호도 미소를 보였다.
“수진 말대로, 그 시절엔 참 열심이었지. 글 한 줄에 밤을 새우던 때니까.”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옛이야기로 옮겨갔다. 발표회를 준비하며 도서관에 쌓아 두었던 책 더미, 봄 소나기 뒤 젖은 운동장에서 우산을 나눴던 기억, 동아리 방에 흐르던 라디오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연회장의 소음은 배경처럼 흐르고, 테이블 위 작은 섬처럼 그들만의 시간이 형성됐다.
“그때 네가 쓴 시, 아직도 기억나.”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첫 구절이 ‘봄의 문턱에서 바람은 익숙한 이름을 부른다’였지.”
영숙은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잊을 수가 있나. 네 목소리로 들은 그 구절이 내겐 오래 남았거든.”
짧은 대화였지만, 영숙의 가슴 속에 오래된 메아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기억 속 낭독회의 떨림이 현재와 겹쳐지며, 눈가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괜히 잔을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잔 위로 창밖 햇살이 부서져 들어와 와인빛과 섞였다. 봄의 공기가 연회장 안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수진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아이고, 둘이 옛날 얘기만 하네. 나까지 괜히 설레잖아.”
영숙이 손사래를 쳤지만, 얼굴에는 미묘한 홍조가 번졌다. 준호는 말없이 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
연회장 한쪽에서는 사회자가 준비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추억의 퀴즈, 졸업 앨범 속 이름 맞히기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영숙과 준호는 그 소리에 온전히 섞이지 않았다. 작은 유리벽 너머의 세계처럼, 둘의 공기만 따로 고였다.
“네가 올 줄 몰랐어.”
영숙이 낮게 말했다. 대화라기보다는 속마음이 흘러나온 듯했다.
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올까 말까 많이 망설였어. 그런데 초대장에 적힌 문구가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고. ‘봄의 초대장’… 이상하게, 그 말이 나를 불러내더군.”
영숙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 역시 그 문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다시 펼친 듯, 낯설고도 친숙했다. 그녀는 순간 목이 타는 듯 와인을 삼켰지만,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이 더 분주히 뛰었다.
준호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영숙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회색 정장의 어깨선이 조명에 닿아 반듯한 선을 드러냈다. 테이블 위 와인잔이 두 사람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것은 투명한 장막에 불과했다. 그 순간 수진이 눈치 있게 일어나 옆 테이블로 옮겼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그녀의 미소에는 장난과 배려가 함께 묻어 있었다.
둘만 남은 자리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연회장은 여전히 떠들썩했지만, 영숙의 귀에는 오직 준호의 숨결만이 뚜렷하게 들렸다. 그녀는 잔을 가볍게 돌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와인 표면이 흔들리며 붉은 빛을 흩뿌렸다.
“네가 여기 있을 줄 몰랐어.”
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지만, 끝자락이 살짝 떨렸다.
“나도.”
영숙은 가볍게 웃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웃음은 잠시뿐이었다.
“안 올까 하다가… 결국 오게 됐어.”
그는 잔을 굴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유리잔 속 붉은 빛이 손끝에 묻어나듯 번졌다.
“와 줘서 다행이야.”
영숙은 잔잔히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창밖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고, 바람에 섞인 꽃 향이 스쳐 들어왔다. 화분에 꽂힌 벚꽃 잔가지가 가볍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불편하기보다 오래된 기억이 스며드는 통로 같았다. 준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꺼냈다.
“그때 도서관, 기억나지? 글 쓰겠다고 밤새 창가에 앉아 있던 거.”
“기억나. 새벽까지 앉아 있다가, 아침 햇살에 눈 시뻘겋게 충혈돼서 나온 날들.”
영숙의 웃음 속에 그 시절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네가 쓴 시, 아직도 기억해. 첫 줄이 ‘봄의 문턱에서 바람은 이름을 부른다’였잖아.”
준호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
“그 구절이 내게 오래 남았어.”
영숙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잊을 수가 있나. 네 목소리로 들은 그 말이, 그때는 꼭 내 얘기 같았거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잔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영숙은 당황스레 잔을 들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와인의 향이 코끝을 스쳤으나, 입술은 닿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이 묘하게 흔들렸다.
대화는 조심스레 이어졌다. 졸업 이후 소식이 끊긴 동창들의 이름이 오갔고, 문예반 지도교수의 근황도 언급됐다. 서로의 삶은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대화의 온도만큼은 여전히 비슷했다.
“넌 요즘 글은 안 써?”
준호가 물었다.
“가끔. 약국 일에 치이다 보면 손이 잘 안 움직여. 그냥 일기 정도만.”
“그럼 아직 마음속에는 글이 있네. 글은 사라지지 않아. 나도 가끔 펜을 들면 그때 생각이 나거든.”
그의 고백에 영숙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와인잔에 비친 조명이 눈가에 닿아, 오래된 기억과 지금의 감정이 뒤섞였다.
멀리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잠시 후엔 추억 퀴즈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공기는 그 소리에 휩쓸리지 않았다. 마치 유리벽으로 분리된 작은 공간처럼, 오직 둘만의 시간이 흘렀다.
영숙은 문득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회색 정장의 단정한 선, 미간에 드리워진 세월의 주름,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 선명함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다시 시작일까.”
준호도 그녀를 바라봤다. 말없이 잔을 굴렸지만, 손끝이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서로의 떨림을 감춘 채, 두 눈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