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봄날의 동창회 (2)

1장 ― 봄날의 동창회 (2)

by 윈플즈

1장 ― 봄날의 동창회 (2)

사회자의 퀴즈가 한창이었지만 두 사람은 참여하지 않았다. 웃음소리와 박수는 연회장을 가득 채웠으나, 영숙과 준호의 테이블은 작은 섬처럼 고요했다. 삼십 년의 시간이 잔과 잔 사이에 얇은 막처럼 남아 있었다.


준호가 먼저 잔을 내려놓았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우린 왜 이렇게 금방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까.”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단정하고 직설적인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영숙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돌아간 걸까, 아니면… 사실은 그때 그대로인 걸까.”

그녀의 말은 길게 이어졌고, 끝부분에서 살짝 흔들렸다. 긴 호흡 속에 회상이 묻어났다.


준호는 짧게 웃었다가 곧 진지해졌다.


“사실은 네 앞에 앉아 있는 게 아직도 낯설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그 사이가 제일 힘들더라.”

말끝이 짧고 단정했지만, 손끝이 유리잔을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영숙은 와인잔을 두드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도 그래. 네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반가웠어. 그런데 동시에 겁이 났어. 그 감정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목소리는 낮았지만 길게 이어지며, 그녀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창밖 바람이 커튼을 스쳤다. 작은 꽃잎 하나가 화분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영숙은 무심코 손끝을 움켜쥐었다. 가슴 안쪽까지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때 말이야.”

준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발표회 준비하던 날, 네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그런데 결국 못 했지.”

영숙은 놀란 듯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곧 눈을 떨구며 잔을 돌렸다.


“왜 못 했는데.”

호흡이 길고 조심스러웠다.


준호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달라질까 봐. 네가 날 멀리할까 봐. 난 겁이 많았어.”

짧지만 단단한 어조였다.


영숙은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잔 바닥에 남은 빛이 손등에 부서졌다.


“나도 겁이 났어. 혹시 그 마음을 잘못 듣거나… 받아들일 용기가 없으면 어쩌나.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어.” 긴 호흡의 고백은 회한처럼 흘러나왔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종업원이 접시를 치우며 분위기를 끊자,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는 다 전하지 못한 긴장이 숨어 있었다.


준호가 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중얼거렸다.

“혹시…”


그러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영숙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은 이미 깊어져 유리창 너머 어스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이제 와서…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말은 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끝이 잔의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금속성의 울림이 퍼져나갔고, 준호는 그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나 곧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풀리지 않은 대화는 여전히 공기 속에 남아 있었고, 그것은 결국 연회장 바깥으로 이어질 듯했다.


자정 무렵, 연회장은 절반 이상 비워졌다.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무리, 남은 와인잔을 부딪히며 마지막 건배를 나누는 무리. 종업원들은 테이블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식은 수프와 와인의 향이 공기 속에 은근히 남아 있었다.


영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그녀가 코트를 걸치자, 옆에서 준호도 함께 섰다. 순간 눈빛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삼켰다.


“같이 나갈래.” 준호의 제안은 짧고 단정했다. 눈빛은 차분했으나, 안쪽에서 작은 흔들림이 스쳐갔다.


영숙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로비로 향했다. 로비 한쪽에서는 여전히 피아노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져 길게 반사되었다. 발걸음은 느렸고,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현관을 나서자 봄밤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낮의 온기와 달리 밤바람은 서늘했지만, 그 차가움마저 신선했다. 화분에 꽂힌 벚꽃 가지가 흔들리며 꽃잎 몇 장이 흩날렸다. 바닥에 쌓인 꽃잎이 발끝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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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와 줘서 고마워.”

영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긴 호흡의 목소리였다.


“고맙긴. 난… 오늘 네 얼굴을 본 것만으로 충분해.”

준호의 대사는 짧고 단호했다. 그러나 눈빛 속에는 오랜 그리움이 번졌다.


영숙은 그 말에 시선을 숙였다. 코트 주머니 속 손끝이 스스로 움츠러들었다. 그 떨림을 감추듯 클러치를 단단히 쥐었다.


호텔 앞 도로에는 택시들이 몇 대 줄지어 서 있었다. 동창들이 손을 흔들며 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대로 현관 앞에 남아 있었다. 주위의 소음은 멀리서 울리는 배경음처럼 희미했다.

준호가 숨을 고른 뒤 조용히 말했다.


“다음 주에… 도서관 앞 벚꽃길. 같이 걸어줄래.”

말은 담담했지만, 속내가 스며 있었다.


영숙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걸어보자.”

긴 호흡의 대답은 부드럽게 울렸다.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준호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대가 동시에 어려 있었다. 영숙은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먼저 미소를 지었다. 봄바람이 머리칼을 스쳤고, 꽃잎 한 장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럼, 다음 주에.”

준호는 단정히 손을 흔들었다.


“응… 다음 주에.”

영숙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길게 남았다.


그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뒷모습은 작아졌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오히려 더 크게 각인되었다.


택시를 잡을까 하다 영숙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봄밤 특유의 습기가 도로 위에 번졌고, 가로등 불빛이 그 위에서 흔들렸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에 닿으며 일정한 리듬을 냈다. 그 리듬은 가슴 박동과 묘하게 겹쳐졌다.

집 근처에 이르자 새벽이 가까워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의 가로등 아래, 벚꽃잎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영숙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발끝으로 꽃잎을 밟자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오래된 기억을 밟는 소리이자, 새로운 시작을 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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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정적이 맞아왔다. 그러나 오늘의 정적은 달랐다. 공기 속에 묘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걸고, 클러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작은 노트를 꺼내 펼쳤다. 오래된 글귀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한 문장이 새겨진 듯했다.


“다음 주에, 함께 걷는다.”


영숙은 노트를 덮으며 조용히 웃었다. 창문을 열자 새벽 바람이 커튼을 밀고 들어왔다. 바람은 부드럽게 방 안을 스치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그 공기 속에서 오늘의 여운을 다시 느꼈다.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약속이 한자리에 겹쳐 있었다. 그녀의 봄날은, 조용히 문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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