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늦은 오후 카페 창가 (1)
늦은 오후였다. 실처럼 가늘지만 멈추지 않는 비가 카페 유리창을 두드렸다. 물방울이 유리 위에서 서로 엉겨 굵은 선이 되면, 바깥 풍경은 번져 모서리를 잃었다. 길의 색은 희미해졌고, 사람들의 우산은 모두 회색 그림자처럼 비슷해졌다. 카페 안은 그와 반대로 분명했다. 스피커에서 나온 재즈 피아노가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걸었고,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가 낮게 숨을 쉬었다.
선미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책을 펼쳤지만, 시선은 자꾸 창밖으로 미끄러졌다. 세 번째로 같은 문단을 되짚는 사이, 카푸치노의 거품은 거의 사라졌다. 잔의 안쪽에 남은 희미한 원이 물웅덩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컵받침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쓸고,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비 오는 날이면 늘 그러했다. 익숙한 버릇은 마음을 일정하게 만들었다.
문이 열렸고, 종이 맑게 울렸다. 젖은 바람이 한순간 스며들었다 사라졌다. 우산을 접은 남자가 카운터 앞에 잠깐 멈췄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 바 좌석까지 꽉 차 있었다. 그는 실내를 한 바퀴 훑고는 선미 쪽을 향했다. 맞은편의 빈 의자 하나가 마지막 자리였다.
“실례합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이 자리, 같이 써도 괜찮을까요? 다른 자리가 없어서요.”
선미는 고개를 들었다. 코트 어깨 위에 남은 물방울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무례한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네. 앉으세요.”
그는 우산을 벽에 세워두고 마른 종이로 손잡이를 한 번 훑었다. 그러고 나서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표지가 드러났다. 선미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읽고 있던 책과 같은 제목, 같은 판형, 같은 낡은 모서리였다.
남자가 살짝 웃었다.
“이 책 읽는 분, 잘 못 보았는데요.”
“그러게요.”
선미가 답했다.
“마주 보고 같은 책을 펼친 건 처음이에요.”
짧은 말이 테이블 가운데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빗소리가 그 말을 감쌌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남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선미는 식어버린 카푸치노 대신 얼그레이를 주문했다. 잠시 후 서로 다른 온도의 잔이 나란히 놓였다. 김이 오르는 잔과 맑게 비치는 잔. 두 잔 사이에 투명한 경계가 생겼다.
“어디까지 읽으셨어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중반부요. 주인공이 혼자 남겨지는 장면 앞.”
“…저도요. 같은 페이지네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우연이 조용한 결을 갖고 감정 사이로 스며들었다. 선미는 책갈피를 한 칸 뒤로 옮겼다. 남자도 비슷한 동작을 했다. 종이 긁히는 소리가 거의 같은 속도로 났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세요?”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남의 시간을 불필요하게 흔들지 않는 목소리.
“예전엔 싫어했죠.”
선미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방 안이 더 좁아지는 기분이거든요.”
“오늘은요?”
“덜 좁아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남자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책 때문이거나, 사람 때문이거나.”
그의 끝말이 살짝 머뭇거렸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들은 몇 문단을 함께 넘겼다. 어떤 문장에서 둘 다 멈췄고, 같은 문장에서 둘 다 똑같이 숨을 골랐다. 말보다는 보는 쪽을 택했고, 보다가 가끔 짧게 말하는 쪽을 택했다.
창밖의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 가게 안의 조명이 한 톤 더 따뜻해졌다. 손님 몇이 자리를 비우고, 새 손님이 들어왔다. 금세 다시 자리가 찼다. 바리스타가 잔을 닦는 소리가 재즈 베이스 위로 얇게 겹쳤다.
“이 대목.”
선미가 손가락으로 줄을 가리켰다.
“떠나기 직전에 주인공이 한 번 숨을 멈추잖아요. 그게 오래 남아요.”
“결정은 숨 사이에서 생기니까요.”
남자가 짧게 답했다.
“멈추고, 고르고.”
선미는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남자도 이어서 계산했다. 영수증이 연속해서 둘 사이에 떨어졌다. 얇은 종이 두 장이 겹치며 낸 소리가 오래 남았다.
문이 열리고 종이 울렸다. 비 냄새가 다시 스며들었다. 남자가 우산을 펼쳤다. 검은 천 위로 빗소리가 즉시 모였다.
“같은 방향이면, 같이 걸으시죠.” 그가 말했다. 제안이었지만, 강요는 아니었다.
선미는 반 박자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은 우산 아래로 들어섰다. 좁은 공간의 온기가 금세 섞였다. 우산살 끝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골목의 네온은 비에 젖어 무른 색이 됐다. 제과점에서 단내가 퍼졌고, 세탁소의 따뜻한 스팀이 그 위로 얇게 덮였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오늘만큼은 안쪽으로 기울어 편안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 사이로 우산들이 스쳤다. 선미가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오래된 버릇. 남자의 시선이 잠깐 거기에 멈췄다가 가볍게 물러났다.
“아, 인사를 늦게 드렸네요.”
신호가 바뀌고 난 뒤에야 남자가 말했다.
“저는 민호입니다.”
“선미예요.”
이름이 오가는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서로를 부를 수 있는 길이 생겼다.
모퉁이를 돌아 공원 가장자리로 접어들었다. 벤치 몇 개가 비에 젖어 있었다. 바닥의 잎사귀는 물을 머금고 더 짙은 색이 되었다.
“잠깐만요.”
민호가 속도를 늦췄다.
“여기 비 냄새가… 오늘따라 좋아서요.”
둘은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고, 앞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앉았다. 우산을 반씩 나눠 들었다. 바람이 올 때마다 물방울이 튀었지만, 그 또한 말 대신 시간을 채워 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선미가 물었다. 질문은 가벼웠다.
민호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예전에, 우산을 나눠 썼던 적이 있어요. 오래전인데도 그때 걸음의 속도만큼은 기억나네요.”
“같은 속도.”
선미가 짧게 되뇌었다.
“네.” 민호가 미소 지었다. “누구와 걷느냐가 그날의 속도를 정하죠.”
그 말이 벤치 아래 고인 물에 잔물결처럼 번졌다. 선미는 더 묻지 않았다. 이름을 물어도 무방했지만, 오늘은 그 기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둘은 다시 일어나 걸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의 불빛이 가까이 왔다. 비를 머금은 플라타너스 잎이 무겁게 흔들렸다. 출입구 캐노피 끝에서 물방울이 연속으로 떨어졌다. 그 리듬이 우산 위 빗소리와 맞물렸다.
“오늘은 길이 금방이네요.”
선미가 웃었다.
“같이 걸어서 그렇죠.”
민호의 대답은 짧았다. 짧아서 오래 남았다.
문 앞에서 둘은 잠깐 멈췄다. 선미가 먼저 말하려다, 민호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다음에… 같은 자리에서 이어 읽을까요?”
“좋아요.”
선미는 군더더기 없이 대답했다. 조건과 주석이 없는 약속. 그게 좋았다.
민호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인사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미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실내 공기가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민호는 이미 비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의 어깨잽이에 맞춰 연주를 이어갔다.
집 안은 조용했다. 젖은 우산을 세워두고, 스탠드를 켰다. 빛이 책등 위를 길게 쓸었다. 선미는 책을 다시 펼쳤다. 낮에 멈췄던 문장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고독은 나누면 다른 이름이 된다.'
그녀는 책갈피 모서리에 아주 작은 연필점을 찍었다. 아무도 모를 표식. 언젠가 다시 발견하면, 오늘의 공기와 빗소리가 돌아오리라는 신호였다.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티백을 넣었다. 향이 올라왔다. 손바닥으로 머그컵을 감싸며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아주 짧게 말했다.
'그래. 같은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