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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늦은 오후 카페 창가 (2)

2장 ― 늦은 오후 카페 창가 (2)

by 윈플즈

다음 주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햇빛이 유리창에 넓게 내려앉았다. 빛은 지나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초여름의 적당함이 카페 전체에 얇게 깔렸다. 같은 시각, 같은 자리, 같은 의자. 선미는 약속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오늘은 책장을 넘기는 손이 덜 더뎠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종소리보다 먼저 바람이 들어왔다. 민호가 들어왔다. 코트 대신 얇은 셔츠, 차분한 바지, 깔끔한 구두. 그는 선미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많이 해본 사람의 리듬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미세하게 조정한 속도 같았다.


“오셨네요.”

선미가 먼저 말했다.


“예고된 만남이라.”

민호가 웃었다. 자리로 오며 가방에서 같은 책을 꺼냈다. 등줄기의 상처가 지난주와 똑같았다. 시간은 흐르는데, 남아 있는 것들은 남아 있었다. 그런 사실이 둘 사이의 긴장을 조금 낮췄다.


종업원이 다가왔다. 민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선미는 아이스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서로 다른 온도의 잔이 다시 한 테이블 위에 놓였다. 얼음이 잔 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호의 잔에서는 얇은 김이 올랐다.


둘은 같은 문단을 찾아 펼쳤다. 손가락이 활자를 따라 내려갔다. 거의 같은 지점에서 둘의 손가락이 멈췄다. 선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기. 떠나기로 마음먹고도 한 번 더 망설이는 대목.”


“그 망설임 덕분에, 떠남이 말이 되죠.”

민호가 졸처럼 말을 얹었다.

“숨을 한 번 고르지 않으면, 출발은 그냥 도망이니까요.”


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길지 않은 사람. 그러나 빈틈이 메마르지 않은 사람. 그녀는 그가 문장을 고를 때의 손을 보았다. 펜은 없지만, 손가락 끝에 여백을 재는 버릇이 묻어 있었다.


카페 안의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바리스타가 얼음을 붓는 소리, 옆자리의 웃음, 스피커에서 기타가 한 음씩 맑게 떨어지는 소리. 소리들이 겹쳐지다 어느 순간 서로의 볼륨을 낮췄다. 시간이 기울고 있었다.


“이 근처, 자주 오세요?”

선미가 물었다.


“가끔요. 일 때문에.”

민호가 대답했다.

“근처 도서관에서 회의가 있을 때 들릅니다.”


“도서관.”

선미가 따라 말했다.

“저도 그 도서관을 좋아해요. 창가라이트가 부드럽죠.”


“맞아요. 가끔 프로그램이 열리면 잠깐 들르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문예반 봉사를 잠깐 했었어요.”

선미는 잔을 살짝 들어 올리다 멈췄다.


“아, 그렇군요.”
민호가 덧붙였다.


“거기 계시는 윤희 선생님, 아시나요? 예전에 낭독회 진행하시는 걸 뵌 적이 있어서요.”

선미의 표정이 아주 얕게 흔들렸다. 프롤로그의 이름이 둘 사이로 들어왔다. 그러나 억지로 들어온 이름은 아니었다. 동네와 도서관이 공유하는 일상의 반경 안에 있는 이름. 자연스러운 진동.


“가끔 뵈어요.”

선미가 말했다.


“창가 쪽에 앉으시죠.”

“네. 늘 창가.”

민호가 웃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일정하신 분.”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다. 누군가의 이름이 지나갔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함부로 당기지는 않았다. 선미는 그 절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얼음을 한 번 저었다. 투명한 소리가 잔에서 짧게 울렸다.


“혼자 걸었던 길 중에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이 뭐예요?”

선미가 다른 쪽 질문을 꺼냈다.


“밤의 다리.”

민호가 바로 답했다.


“불빛이 물 위에서 길어질 때, 자유와 서글픔이 동시에 느껴지더군요.”

“저는 반대였어요.”

선미가 미소를 지었다.


“늘 같은 벽과 창문 속에서 혼자였죠. 익숙함은 편안했지만, 너무 익숙하면 고립이 되더라고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번 침묵은 공허하지 않았다. 두 잔의 온도가 서로에게 말해 주는 시간이 있었다. 따뜻함이 식는 속도, 얼음이 줄어드는 속도. 각자의 속도가 다르지만 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친밀함을 만들었다.


창밖의 빛이 조금 더 기울었다. 유리창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문장 사이에 잠깐 끼어들었다가 사라졌다. 민호가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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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읽을까요?”


“네.”

선미도 책을 덮었다. 같은 순간 같았다. 우연치고는 정확했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비 대신 바람이 있었다. 바람이 가볍게 머리칼을 건드렸다. 선미가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민호가 짧게 웃었다.


“그 버릇, 책 읽을 때도 하시던데요.”


“페이지가 길어 보일 때 쓰는 습관같은 행동이에요.”

선미가 웃었다.


둘은 카페 앞 골목에서 잠깐 멈췄다가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모퉁이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늦췄다. 물을 흠뻑 먹인 수국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선미가 꽃잎 하나를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젖으면 색이 진해지네요.”


“대신 쉽게 상하죠.”

민호가 말했다.


“진해지는 대신 약해지는 것들.”


말이 길지 않았다. 그러나 비어 있지도 않았다. 둘은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왔다.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건넜다. 공원의 벤치가 오늘은 비어 있었다. 어제의 벤치와 다른 벤치. 날씨가 바뀌면 속도도 바뀌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선미가 먼저 멈췄다. 허리에 끼운 작은 손가방이 미세하게 기우뚱했다. 그녀는 가방을 고쳐 잡았다.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 괜찮으세요?”


“네.”

민호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같은 자리에서.”


둘은 아주 짧게 인사를 나눴다. 선미는 출입구 문을 밀며 돌아보았다. 민호는 손을 들었다. 지나치지 않은 높이. 과하지 않은 선. 그가 돌아서자 바람이 그의 셔츠 자락을 가볍게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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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자 그녀는 스탠드를 켰다. 책을 꺼내 오늘 덮었던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여백에 아주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오늘의 점은 지난주의 것보다 약간 진했다. 컵에 물을 데우며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저녁이 서서히 진해졌다. 오늘은 빗소리 대신, 운동화를 끄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휴대폰을 뒤집었다. 알람을 평소보다 10분 늦췄다.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면 말을 고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충분한 이유였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살짝 기댔다. 가슴 안쪽이 이전보다 덜 좁았다.


잠들기 전, 작은 메모를 한 줄 썼다. 창가, 같은 책, 서로 다른 온도. 종이를 접어 책 사이에 끼웠다. 메모는 낯선 감정의 형체를 잡아주는 가장 작은 틀이다. 불을 끄자 어둠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창가의 빛과 잔 위의 응결이 오래 남았다.


그리고 며칠 뒤, 비 예보가 떴다. 화면 속 구름과 물방울 표시는 늘 보던 그림이었는데, 그날은 전보다 선명해 보였다. 선미는 손가락으로 예보를 한 번 더 밀어 올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서만 짧게 대답했다.


'그래. 조금은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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