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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나이를 잊는다.―여름, 바닷가의 편지 (1)

3장 ― 여름, 바닷가의 편지 (1)

by 윈플즈

3장 ― 여름, 바닷가의 편지 (1)

해가 기울 무렵, 바다는 낮의 성급한 빛을 천천히 거두어 들였다. 낮 동안 바다 위에 쏟아지던 햇살은 한 점 한 점 모서리를 잃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물결 위로 흩어졌다. 파도는 고른 호흡처럼 일정한 리듬을 새기며 모래사장을 오갔다. 밀려왔다가 물러가는 그 간격이, 누군가의 마음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바람은 소금기를 머금어 피부 위에 얇은 막을 남겼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든 바닷바람은 낮보다 차가웠지만, 그 서늘함이 오히려 해가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히 전했다. 갈매기 몇 마리가 낮은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모래 위 발자국은 이미 절반쯤 파도에 지워지고 있었지만, 아직 남은 흔적이 오늘의 시간들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진은 샌들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모래는 하루 동안 데워진 열을 품고 있었고, 발바닥을 감싸는 온기가 의외로 포근했다. 어깨에 맨 가방 안에서는 얇은 종이의 바스락거림이 미묘하게 들려왔다. 지퍼를 스치듯 열고 닫을 때마다 봉투의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그 촉감은 낮의 온도를 기억한 듯 여전히 따뜻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였다. 반납 선반에 꽂힌 책을 꺼내려다, 책과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낯선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오래된 아이보리색 봉투였다. 종이의 표면은 시간이 남긴 듯 부드럽게 닳아 있었고, 접힌 자리에는 누군가의 습관 같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바닷가에서 기다리겠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날짜도 없었다. 이름 하나 없는 문장이었지만, 그래서 더 강하게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든 닿을 수 있는 말. 짧아서 오래 남는 문장이었다. 도서관의 복잡한 소음 속에서도 그 한 줄만은 또렷하게, 마치 그녀를 불러내듯 울렸다.


그날 저녁, 수진은 봉투를 책상 모서리에 세워 두었다. 모니터를 끄고 나서도 눈길은 자꾸만 그 문장으로 흘러갔다. 장난일 거라고, 누군가 책 사이에 끼워 넣은 흔한 실수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수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변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손이 자꾸 봉투를 만지작거렸고, 낯선 문장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을 두드렸다.


“기다리겠다.”는 말은 묘했다. 기다림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자신이 그 자리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아직 알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을 불렀다는 착각. 그 착각을 애써 부정했지만, 부정 속에서 더 강하게 문장이 살아났다. 결국 그녀는 이곳까지, 바다 앞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다.


해변에는 아직 낮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쌓아 올린 모래성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연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마지막 손님들을 태우며 경적을 울렸다. 파라솔이 하나둘 접히고, 소란스러운 발자취가 빠져나가자 바다는 서서히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


수진은 물기가 스민 모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파도의 끝이 발목을 간질이고 사라졌다. 발자국은 잠깐 선명했다가 금세 희미해졌다. 그 덧없음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마치 기다림도 순간의 흔적일 뿐, 사라져야 비로소 새롭게 남는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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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근처에 이르러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앉았다. 가방을 열어 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글씨는 번짐 없이 선명했다. 그러나 선명함의 이면에는 오래된 시간이 켜켜이 접혀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 말로 하루를 버텼을지도, 누군가는 이 말 때문에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해초 냄새와 바닷물 냄새, 하루의 열이 식으며 풍기는 먼지 냄새가 한꺼번에 스며들었다.


문장을 바라보며 수진은 생각했다. 이 한 줄이 왜 하필 자신에게 왔을까.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자신이 꺼내 들게 되었을까. 인연이라는 단어가 억지스럽게 떠올랐지만, 억지 속에서도 조금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는 더 기울어 물결마다 주황빛을 흘려 보냈고, 바람은 그 빛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수진은 봉투를 가만히 접어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져도 그 문장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기다리겠다—그 말은 누군가의 다짐일 수도, 스스로의 다짐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 다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스쳤다.


해변의 공기는 한결 차분해졌다. 이제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그리고 그녀의 고른 호흡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흔들렸다. 기다림이라는 말이 낯설게, 그러나 동시에 익숙하게 다가왔다. 언젠가 자신도 그 말을 쓴 적이 있었던 것처럼.


“정말 오셨군요.”


등 뒤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진은 놀라 어깨를 돌렸다. 해변길 쪽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해가 기운 시간, 붉은빛에 잠긴 그의 모습은 선명하면서도 부드럽게 번져 있었다. 키가 크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건강한 갈색을 띠었다. 짧게 정리된 머리칼, 무심해 보이는 표정. 그러나 그의 눈빛은 신중한 호기심을 품은 채 맑았다.


그의 손에도 비닐에 싸인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수진은 무릎 위의 종이를 반쯤 접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같은 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열어 보였다. 안에는 똑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바닷가에서 기다리겠다.” 글씨체는 달랐지만, 말의 온도는 같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짧게 웃었다. 어색함을 깨는 웃음이었으나, 가볍지 않았다.


“처음엔 광고 전단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봉투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우편함에 끼워져 있길래 버리려다… 손끝에서 떨어지질 않더군요.”


“전 책 사이에서 발견했어요.”

수진이 봉투를 들어 보였다.

“사서가 ‘실수’라며 웃었는데, 그 뒤로도 자꾸 마음이 잡아당겨서요.”


“그래서, 결국 오셨네요.”


“네. 아니… 아마 불린 거겠죠.”

수진의 목소리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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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모래사장 경계에 서서 잠시 파도를 바라봤다. 바짓단이 젖었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기다리겠다는 말, 참 묘하죠. 대상이 없어도, 문장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니까.”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든, 안 오든 서 있는 사람의 결심 같아요.”


그 순간, 남자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그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준호야. 지금? …응, 바닷가 근처인데.”

목소리가 낮았지만 친근함이 묻어났다.


수진은 무심히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의 말이 파도 사이로 또렷이 들려왔다.


“그래, 동창회 잘 다녀왔다고 했지? …뭐라고? 영미?”

그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네가 그렇게 좋아했던 영미 말이야? …하하, 그래? 아직도 설렌다고? …아니, 그냥 반가운 게 아니라, 지금도 마음이 그대로라니.”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이며 친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수진은 무심히 파도를 바라보며, 그러나 귀는 그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알아. 네가 예전에도 늘 영미 얘기했잖아. …응?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와, 그건 진짜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마치 친구의 설렘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래, 준호야. 그 감정이면 충분해. 늦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더 깊어졌을지도 모르지. 다음에 만나면 자세히 얘기해 줘.”


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고르듯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 끝에 번지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도 번져 들어왔다.


수진은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화 속 이야기는 자신과 무관했지만, 오래된 감정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의 떨림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자는 수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요. 방해했죠?”


“아니요. 오히려… 설레는 감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수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이름을 밝히듯 천천히 말했다. “

저는 태석이라고 합니다.”


“수진이에요.”

그녀도 이름을 내밀었다. 이름이 바람에 실려 바다로 퍼졌다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두 사람의 사이에 새로운 결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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