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여름, 바닷가의 편지 (2)

3장 ― 여름, 바닷가의 편지 (2)

by 윈플즈

3장 ― 여름, 바닷가의 편지 (2)

이름을 나누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수진은 봉투를 접어 가방 속에 다시 넣고, 모래 위에 손을 짚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태석은 바위 근처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의 숨결이 대화의 여백을 채웠다.


“책 사이에서 봉투를 발견했다고 하셨죠?”

태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반납 선반에 꽂힌 책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꺼냈는데, 갑자기 봉투가 툭 떨어지더라고요.”

수진은 그때의 놀람을 떠올리며 웃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갔어요.”

“저도 비슷했어요. 광고 전단이라 치부하기엔, 문장이 너무 단단했거든요. ‘기다리겠다’는 말이 이렇게 묵직한 줄 몰랐습니다.”

태석의 목소리는 낮지만 깊었다. 바람에 섞여도 쉽게 흩어지지 않는 울림이었다.


수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늘 나오면서 망설이지는 않으셨어요?”


태석은 잠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망설임보다 설렘이 더 컸습니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기다림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그 말에 수진은 순간 가슴이 저릿해졌다. ‘함께 기다린다’는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늘 두려워했던 고립된 시간이, 갑자기 둘이 나누는 시간으로 변하는 듯했다.


파도 끝에서 하얀 거품이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수진은 발끝으로 모래를 쓸며 입을 열었다.

“저는 늘 남의 글을 다루다 보니, 제 말은 잘 꺼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한 줄이, 제 말을 먼저 들려준 것 같았어요.”


태석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건축 일을 하면서 늘 도면과 수치에 매달려 살았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봉투 속 그 한 줄이 제게는 좌표처럼 느껴졌습니다. 잃어버린 길을 가리키는.”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가, 파도로 흩어졌다. 말보다 침묵이 더 분명하게 전하는 순간이었다.


ChatGPT Image 2025년 9월 13일 오후 07_23_06.png


“사실, 조금 전 전화 온 친구요.”

태석이 문득 말을 이었다.

“동창회에 다녀온 친구인데…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를 다시 만났다고 하더군요. 목소리만 들어도 설레는 게 느껴졌습니다.”


수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감정, 부럽네요.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여전히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확실해졌어요. 오늘 여기에 나온 게 헛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요.”


태석은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지만, 목소리엔 묘한 진심이 묻어 있었다.


수진은 그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녀는 그것을 고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몇 번과 짧은 대화뿐이었지만, 바다의 리듬이 그 공백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있었다.


“혹시…”

수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여기서 뵐 수 있을까요?”


태석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얇은 글자를 그렸다. “내일.” 파도가 밀려와 그 글자를 곧 지웠지만, 수진의 눈에는 또렷하게 남았다.


그녀도 모래 옆에 조용히 한 글자를 썼다. “기다림.” 두 단어가 나란히 놓였다가, 파도의 한 번 숨에 흐려졌다. 그러나 그 자취는 오히려 오래 남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등대 불빛이 멀리서 깜빡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서늘해졌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저녁의 바람이 한결 짙어졌다. 바닷가의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며 불빛을 거두었고, 파도의 호흡만이 남았다. 수진은 모래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옆에 앉은 태석은 손바닥으로 모래를 쓸며 잠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침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레 두 사람을 감쌌다.


“사실은…”

태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이곳에 나오기 전에 마음을 다잡으려고 바닷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돌아가려다가,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어요.”


수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저도요. 방에서 가방을 닫았다 열었다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괜히 오는 게 아닐까, 괜히 기대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태석은 잠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마주 앉았네요. 우연이든 아니든, 이제는 선택이 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거칠지 않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어제와는 다른 결, 그러나 여전히 바다였다. 수진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선을 그으며 천천히 물었다.

“혹시, 오늘 이 만남이 잠깐의 스침으로 끝나 버릴까 두렵지는 않으세요?”


태석은 그 말을 곱씹듯 잠시 머물렀다가 대답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설렙니다.”


수진은 그 말에 가만히 웃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태석은 무심한 듯, 그러나 분명히 의도한 듯 바람을 막아 주는 위치로 몸을 옮겼다. 그 짧은 몸짓이, 어떤 고백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기타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누군가가 바닷가 벤치에 앉아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불안정한 코드였지만, 파도와 섞이니 오히려 더 그럴듯한 음악이 되었다. 수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 작은 문장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태석 씨.”

그녀가 불렀다.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자, 순간 공기가 환해지는 듯했다.


“만약 내일도 우리가 여기서 우연히 다시 마주한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겠죠?”


태석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도, 모레도, 우리가 계속 같은 자리에 있다면 그건 인연이겠죠.”

파도 끝에서 하얀 거품이 길게 번졌다. 수진은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일은… 제가 태석씨를 찾아볼께요.”

태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미소는 크지 않았지만, 오래 남을 표정이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닷바람이 치맛자락과 셔츠 끝을 스쳤다.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수진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럼…인연이 된다면 내일 봐요.”


태석도 손을 들어 응답했다.

“내일 꼭 봐요.”

두 단어가 바람 속에 겹쳐 울렸다. 마치 짧은 시의 끝맺음처럼.


ChatGPT Image 2025년 9월 13일 오후 07_32_24.png


수진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가방 속 엽서를 다시 꺼내 확인했다. 낮에 적었던 글씨가 아직도 또렷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으며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이제 기다림은 혼자가 아니다.”


바다는 멀리서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ChatGPT Image 2025년 9월 13일 오후 07_23_06.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은 나이를 잊는다.―여름, 바닷가의 편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