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다시 마주친 골목 (1)

4장 ― 다시 마주친 골목 (1)

by 윈플즈

4장 ― 다시 마주친 골목 (1)

준호는 오후 내내 구청 민원실에 앉아 있었다. 회사에서 맡긴 소유권 이전 서류 때문에, 직접 와서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다. 창구 앞 의자는 늘 그랬듯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와, 오래 기다린 사람들의 한숨이 섞여 있었다. 서류를 건네고 도장을 찍을 때까지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그는 괜히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후 네 시 반. 평소라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천천히 옮겨졌다.


구청을 나와 큰길 모퉁이를 돌자 작은 편의점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문이 열리며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시원한 공기와 라면 냄새, 그리고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컵라면들이 하루의 무게를 잠시 잊게 했다. 준호는 물 한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며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내다봤다.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편의점 유리문 너머,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고 가벼운 장바구니를 든 여자가 골목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영미였다.


준호의 손끝이 순간 굳어 컵라면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얼른 물병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심장이 들키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동창회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이후로, 영미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도, 출근길 전철 안에서도, 심지어 서류를 넘기던 순간에도 자꾸만 그 미소와 목소리가 겹쳐졌다.


영미가 편의점 앞까지 걸어와 자동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먼저 들어오고, 그녀가 뒤따라 들어왔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영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짧게 웃었다.


“준호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긴장했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준호는 괜히 어색하게 웃으며 물병을 계산대에 올렸다.


“어… 영미야. 여기서 다 보네.”


“그러게. 너네 집 근처 아니잖아? 여기 웬일이야?”


계산을 마치고 물병을 받아 들며 준호가 답했다.

“구청에 일 때문에 좀 왔다가… 그냥 물 하나 사가는 길이야.”


영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대 쪽으로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호는 잠시 숨을 고르듯 물병을 세게 쥐었다. 평범한 대화였는데도,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을 두드렸다. 그는 괜히 계산대 옆 광고지를 훑는 척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영미 너, 여기서 가까이 산다 했었지?”


“응, 바로 뒤 아파트. 장 좀 보러 나온 거야.”

장바구니에 우유랑 식빵을 넣으면서 영미가 대답했다.


준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심하듯 물었다.

“그럼… 같이 나갈래? 나도 그냥 돌아가는 길인데.”


영미는 짧게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뭐. 가는 길이 같으면.”


편의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골목길로 걸어 나왔다. 바람은 아직 습기가 남아 있었지만, 노을빛이 천천히 번져 건물 벽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준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그냥 서류 봉투와 물병뿐이던 하루였는데, 지금은 그 옆에 영미가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길은 이른 저녁의 빛으로 가득했다. 건물 사이로 흘러든 햇살이 벽돌 담장 위를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전선 위에 앉은 비둘기들이 느릿하게 목을 움직였다. 길모퉁이 꽃집에서는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늘어졌다가 끊겼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마음은 조금 앞서 달리고 있었다.


영미는 장바구니 손잡이를 고쳐 쥐며 대답했다.

“회사 다니고, 딸이랑 같이 살고. 뭐, 늘 비슷하지 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미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동창회 때 다시 들었지만, 직접 그녀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실감이 났다.


“딸이랑 같이 사는구나. 몇 살이지?”


“스물여섯. 이제 직장 다니고 있어. 출근 준비하는 거 보면, 예전 내 모습 보는 것 같아.”

영미가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가볍지 않은 세월이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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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스물여섯’이라는 숫자가 그의 귀에 오래 맴돌았다. 그는 문득, 자신은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이 묘하게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 마음 한켠에서 이상한 감정이 일었다. 나이와 상황은 달라도, 함께 걷는 이 순간만큼은 20대 시절처럼 풋풋한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너는? 아직 혼자야?”

영미가 물었다. 목소리는 가볍지만, 눈빛은 조금 더 깊게 그를 살폈다.


준호는 잠시 웃었다.

“어… 응. 그냥 혼자야.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영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바라봤다. 골목 입구 슈퍼에서 손님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플라스틱 간판이 덜컥 소리를 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나도 이렇게 혼자일 줄은 몰랐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 사이에 묵직한 이해가 깔린 듯했다. 같은 세월을 다른 자리에서 겪었지만, 남겨진 결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을 벗어나자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가로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노을빛을 흩뿌렸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두 사람의 어깨에 주황빛이 고르게 내려앉았다. 준호는 신호등이 바뀌기 전,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미야, 솔직히… 동창회에서 너 보고 많이 놀랐어. 그냥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아서.”


영미는 피식 웃었다.

“그대로긴 뭐가. 주름도 늘고, 흰머리도 늘었지.”


“아니야. 난… 옛날에 네가 웃던 모습, 그게 지금도 똑같이 보였거든.”


준호의 말은 서툴렀지만, 감정은 숨기지 못했다. 신호등 불빛이 초록으로 바뀌며 둘은 나란히 도로를 건넜다.

영미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이 흔들리며 노을빛을 가렸다가 드러냈다. 그녀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준호는 그 속도에 맞추어 걸음을 조정했다.


두 사람은 도로 건너편 작은 카페 앞에서 잠시 멈췄다. 유리창 너머, 노란 조명 아래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바깥 테이블 위에는 찻잔에서 김이 올랐다. 준호는 무심한 듯 물었다.

“잠깐 차라도 할래?”


영미는 장바구니를 들여다봤다. 우유와 식빵, 몇 가지 채소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준호를 바라봤다.


“시간은 있어. 딸은 늦게 들어오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고리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울리며, 순간 공간이 더 밝아지는 듯했다. 노을빛과 카페 조명이 겹쳐, 두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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