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다시 마주친 골목 (2)

4장 ― 다시 마주친 골목 (2)

by 윈플즈

4장 ― 다시 마주친 골목 (2)

카페 안은 바깥과 달리 따뜻한 공기로 차 있었다. 원목 테이블과 부드러운 조명,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이 분위기를 감쌌다. 바닷가 근처의 작은 카페였지만, 손님들은 대부분 동네 주민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준호와 영미는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바깥 유리창 너머로는 붉은 노을이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자, 준호는 아메리카노를, 영미는 따뜻한 허브티를 주문했다.


“여긴 자주 와?”

준호가 물었다. 영미는 장바구니를 발치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끔. 일 끝나고 딸이랑 같이 오기도 하고… 오늘은 그냥, 집에 바로 가기 싫어서.”


그 말에 준호는 미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바로 가기 싫었다’는 말이 단순한 습관인지, 오늘에만 해당하는 기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나도 그래.”

준호가 말했다.


“요즘은 혼자 집에 들어가는 게 더 낯설어. 조용한 게 오히려 시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


영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받침 위에 손을 올렸다.

“알아. 나도 그래. 사람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지.”


잠시 뒤,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김이 오르는 허브티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영미는 향을 들이마셨다. 눈가가 살짝 풀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향, 딸이 좋아하는 거랑 비슷하다.”


준호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예전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시험이 끝나고 도서관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날, 영미가 아이스티를 들고 웃던 모습이 지금과 겹쳐 보였다.


“넌 예전에도 웃을 때 참… 뭐랄까, 주변까지 환해졌어.”


준호의 말은 무심한 듯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영미는 놀란 듯 눈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얼굴에 노을빛이 비쳐 더욱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그런 말 하니까 쑥스럽네.”

영미가 작게 웃었다.


“나도 그때 생각나. 학교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거.”

준호의 마음이 순간 뜨겁게 일렁였다.


“그때 사실… 네 옆에 더 오래 있고 싶었어. 근데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그냥 돌아섰지.”


영미는 허브티를 내려놓으며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땐 용기가 없었던 거야?”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용기가 없었어. 혹시라도 네가 웃지 않으면, 그게 무서웠거든.”


카페 안의 음악이 한층 잔잔하게 흘렀다. 둘 사이의 말은 많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오래 눌러뒀던 감정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영미는 한 모금 차를 다시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 마음은… 늦게라도 전해지면 되는 거 아닐까?”


준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어졌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 이상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창밖에선 가로등이 켜지고, 바닷바람이 유리창을 스쳤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시간은 잠시 멈춘 듯했다.


시간이 어느새 흘러 카페 시계 바늘이 저녁 아홉 시를 가리켰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종업원은 커피머신을 닦으며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미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도 슬슬 일어나야겠다.”


준호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를 나섰다. 문을 열자 바닷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바다는 이미 검푸른 밤빛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파도 소리만이 묵직하게 이어졌다. 길가의 가로등이 주황빛을 흘리며 젖은 보도를 비추고 있었다.


“집까지 걸어갈 거야?”

준호가 물었다.


“응. 가까우니까. 요즘은 일부러 걸어 다니는 게 좋아. 생각 정리도 되고.”

영미가 대답했다. 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연스럽게 한마디를 보탰다.

“그럼 같이 걸을까? 차는 내일 가지러 와도 되니까.”


영미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바람에 섞인 바다 냄새와 오래된 벽돌 건물에서 풍기는 습기가 함께 흘러왔다. 몇 걸음마다 작은 잡화점 불빛이 번져 있었고, 유리창 너머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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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참 이상하다.”

준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영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네가 옆에 있다는 게.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순간 같아서.”


영미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 대신 가방 끈을 꼭 쥔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나도 그래.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 들어.”


준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는 영미의 말을 곱씹듯 되새겼다. 그토록 바라던 대답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 같아 가슴이 뜨겁게 뛰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영미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출입구 불빛이 따뜻하게 번져 있었다. 영미는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오늘 고마워. 집까지 같이 와줘서.”


준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오랜만에… 이렇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영미는 문 앞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준호를 다시 바라봤다.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내 담담하게 멈췄다.


“준호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묘한 떨림이 있었다.


준호는 짧게 대답했다.

“응?”


영미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그냥 불러봤어.”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어색하지 않은, 마음이 통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영미는 출입구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들어가. 조심히.”


준호는 발걸음을 돌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응. 너도. 좋은 밤.”


그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기 전, 영미는 뒤돌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오래전에 잊은 줄 알았던 설렘이, 지금 막 다시 시작된 듯 뛰고 있었다.


준호 역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웃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확신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다시 만나야 한다.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밤하늘엔 구름이 걷히며 별빛이 드러났다. 파도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지만, 그 위로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 크게 울렸다. 오늘의 짧은 밤은, 앞으로 길게 이어질 무언가의 시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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