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같은 문장을 다른 숨으로 (1)

5장 ― 같은 문장을 다른 숨으로 (1)

by 윈플즈

5장 ― 같은 문장을 다른 숨으로 (1)

오랜만에 비 예보가 없던 날, 도서관 유리벽에 햇빛이 넓게 붙었다. 오전의 빛은 얇고 단단했다. 선미는 개방형 열람실 끝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가 흔들렸고, 나뭇잎의 그림자가 바닥에 바느질하듯 이동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얇은 연필과 같은 책을 꺼내 페이지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책갈피 맨 끝엔 작은 연필점이 있었다. 오늘 멈춘 자리를 표시할 때마다 찍던,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점. 선미는 그 점을 엄지로 덮었다가 떼었다. 숨이 한 번 고르고 나서야 문장이 또렷해졌다. 책의 인물들이 서로를 피해 같은 길을 도는 장면. 그녀는 짧게 웃었다. 피하지 않으려고 여기 나왔으니까.


“자리, 괜찮으세요?”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다문 문을 두드리듯 들렸다. 고개를 들자 민호가 서 있었다. 민호는 도서관 회원증을 들어 보이며 살짝 웃었다.


“회원 가입, 오늘 했어요.”


“축하해요. 드물게 환영받는 카드죠.”

선미가 속삭였다. 도서관의 공기는 작은 농담도 크게 울리는 법이니, 두 사람은 웃음을 절약하듯 나눴다.


민호는 그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옆자리, 팔걸이 하나를 사이에 둔 대각선. 서로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되, 시선이 닿으려 마음먹으면 닿을 만큼의 거리.


“지난번에 같은 페이지에서 멈췄잖아요.”

민호가 책을 펼치며 말했다.


“오늘은… 각자 읽되, 같은 장에서 쉬기로 할까요?”


“좋네요. 그럼 장의 마지막 줄에서 연필점.”

선미가 연필을 들어 보였다.


서가 사이로 어린아이의 슬리퍼 소리가 통통 튀었다가 멀어졌다. 시계 초침이 벽의 햇빛을 한 칸씩 옮기는 동안, 두 사람은 종이의 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람이 아닌 종이의 숨이 났다. 선미는 문득 생각했다. 같은 장을 읽는다는 건, 같은 계단을 오르는 일과 비슷하다. 속도는 조금 달라도 결국 같은 층에 도착하는 일.


장을 끝냈을 때, 두 사람의 연필점은 거의 동시에 종이 끝에 찍혔다. 민호가 속삭였다.

“점의 크기가… 같네요.”


“아, 그건 습관.”

선미가 낮게 웃었다.

“점이 크면 오늘을 너무 강조한 것 같아서.”


“그럼 작게 찍는 건… 내일을 남겨두는 법?”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서로의 숨을 스쳐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도서관에 사람들이 늘었다. 카트를 밀며 돌아다니던 직원이 책을 정리하는 소리, 복사기에서 종이가 나오는 소리가 낮은 빗줄기처럼 이어졌다. 민호가 메모지 하나를 펼쳐 선미 쪽으로 밀었다.


“창가 카페 가실래요? 지난번 자리.”


그녀는 짧게 “좋아요”라고 적었다가, 옆에 아주 작은 조그만 점을 하나 더 찍었다. 오늘의 점 옆에, 다음을 위한 점. 민호는 그 점을 보며 웃었다.


“두 점이면 콜론이네요. 다음 문장이 오겠다는 의미.”


카페로 가는 길, 공원 분수에서 아이들이 물을 튀겼다. 민호가 발을 늦췄다.


“저기 집게차 보이세요? 저거, 제가 임시 구조물을 설계했던 거예요. 도서관 앞 문화행사 때 쓰려고.”


“아, 그래서 회원증.”


“네. 제 구조물이 도서관이랑 잠깐이라도 엮이려면, 제가 먼저 독자가 되는 게 맞겠다 싶어서요.”


“그런 생각, 좋아요.”

선미가 말했다.

“먼저 독자가 되기.”


창가 자리의 빛은 도서관보다 부드러웠다. 같은 거리지만 책 대신 컵이 있고, 쉼표 대신 거품이 있었다. 바리스타가 얼음을 붓는 소리와 우유 스팀의 숨이 겹쳤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온도의 잔을 주문했다. 선미는 아이스 카푸치노, 민호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오늘은 왜 차가운가요?”

민호가 물었다.


“읽는 동안 마음이 좀 달아올랐어요. 식히는 중.”


민호는 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반대로, 읽다 보니 어딘가 서늘해져서요. 데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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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잔이 테이블 위에서 서로의 온도를 알리는 표식처럼 김을 뿜고, 물방울을 맺고, 반짝였다. 선미는 빨대를 비스듬히 돌리다가 멈추며 말했다.


“이 책의 인물들, 서로 돌아나가기만 하죠.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대체로 오해하고.”


“일종의 안전거리.”

민호가 컵 받침에 손가락을 걸었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사이에 놓는 코스터처럼. 그런데 코스터를 너무 두껍게 깔면, 온기가 못 전해지죠.”


“우리는… 얼마나 깔까요?”

선미가 웃으며 물었다.


민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오늘만큼.”


대화는 그늘 없이 흘렀다. 선미는 자신이 감정의 전면을 급히 열어젖히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안부를 정확히 묻고 있다는 걸 느꼈다. 민호는 질문이 짧았다. 대신 응시가 성실했다. 다 듣고 난 뒤 한 박자 뒤에 오는 대답은 단정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선미가 물었다.


“업무는 비슷해요. 도면을 그려서 보내고, 회신을 기다리고. 대신 주말 스케치를 다시 시작했어요. 종이 위에, 아무 결과를 바라지 않는 선 하나.”


“결과를 바라지 않는 선.”


선미의 시선이 유리창으로 흘렀다.


“그럼 그 선은 어디로 가요?”


“대부분 사라져요. 하지만 손이 기억해요. 다음 번에 덜 힘주게 만들죠.”


“저도 비슷하네요. 지면에서 사라지는 문장들 덕분에, 다음 문장이 조금 덜 무리해요.”


바깥에서 누군가 자전거 브레이크를 잡았다. 얇은 마찰음이 유리창을 통해 말의 끝에 붙었다. 민호는, 지금 이 공기에서 “여기 있어도 되나요?”라고 묻는 느낌을 알아챘다. 선미도, “여기 있어도 된다”라고 대답하는 감각이 자신의 표정에 서려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민호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 주말에도 도서관, 같은 시간? 같은 장의 다음 챕터로.”


“좋아요. 같은 장—다음 챕터.”

선미가 웃었다.


“그 사이에, 아주 작은 점 하나 또 찍어두죠.”


카페를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노란 불이 깜박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깐 멈추고, 다시 흘렀다. 민호가 손목시계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시간, 우리 편인 것 같죠?”


“적어도 오늘은.”


그날의 끝은 별것 없이 조용했다. 좋았다. 별것 없음이 오래 남는 날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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