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 같은 문장을 다른 숨으로 (2)
며칠 뒤, 비가 아닌 바람이 예보되던 늦은 오후였다. 선미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서관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서는 지역 밴드의 작은 리허설이 진행 중이었다. 베이스가 낮게 땅을 찍고, 기타가 그 위에 얇은 선을 그었다. 그녀는 두어 박자 서서 듣다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한 층, 또 한 층. 숨이 너무 차지 않도록, 그러나 쉬지 않도록.
열람실 문을 미는 순간, 창가에 앉은 민호의 옆모습이 보였다. 팔꿈치가 책상 모서리에 얹혀 있고, 검지와 중지가 연필의 균형을 잡고 있었다. 선미가 다가가자 민호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제가 먼저예요.”
“지난번 ‘제가 먼저’는 카페였고요.”
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공평해졌네요.”
두 사람은 예고한 대로 같은 책, 같은 장의 다음 챕터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유리벽을 밀었다. 유리 표면에 아주 가느다란 울림무늬가 번졌다. 누군가 창문을 반쯤 열었다 닫았다. 공기가 한 번 갈아지고, 종이 냄새가 더 선명해졌다.
장을 끝내고, 점을 찍고, 숨을 고르는 사이. 민호가 공책을 꺼냈다.
“이거, 스케치북 겸 메모장.”
그는 도형 같기도 하고 필기 같기도 한 선들을 보여 주었다. 반복과 차이가 섞인 리듬.
“도면과는 다르게, 여기는 실수가 존재할 수 있어요.”
“문장 노트도 비슷해요.”
선미가 자신의 작은 노트를 펼쳤다. 빽빽한 교정 표시 대신 짧은 메모와 날짜가 흩어져 있었다.
“여기는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니까.”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금 같은 장을 나란히 읽는 것도… 그런 자리 같아요.”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네. 오늘은 오늘만큼. 내일은 내일만큼.”
로비에서 올라오던 베이스 소리가 잠깐 컸다가 작아졌다. 누군가 앰프의 볼륨을 조정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선미의 휴대폰이 아주 짧게 떨었다. 화면에는 편집부 단톡방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주 원고 납기, 2일 당김.”
그녀는 화면을 잠깐 바라보다가 천천히 끄었다.
민호가 물었다.
“급한 일?”
“조금요. 그래도 오늘의 점은 찍고 가야죠.”
그는 얇게 미소 지었다.
“점 하나 찍는 데, 오래 걸리지 않잖아요.”
“하지만 의미는 오래 남죠.”
그 말 위로, 촉촉한 공감이 얇게 덮였다. 둘은 같은 장의 마지막 단락까지 나란히 걸어갔다. 점. 작고 분명한 마침표가 종이의 숨 위에 놓였다.
카페로 향하는 길, 바람이 신호등 줄을 울렸다. 푸른 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한 번에 건넜다. 카페 문을 밀자 익숙한 종소리가 반겼다. 오늘은 창가가 아니라 안쪽 벽난로 모형 옆 자리를 택했다. 바람을 등에 두고 앉으면 이야기가 조금 더 따뜻해지는 걸, 지난번에 배웠다.
“일 이야기, 해도 돼요?”
선미가 먼저 운을 뗐다.
“듣는 쪽은 언제나 준비돼 있어요.”
민호가 컵을 받으며 말했다.
선미는 짧게, 그러나 솔직하게 말했다. 마감이 당겨질 때의 호흡, 좋은 문장을 남기기 위해 지워야 하는 문장들, ‘읽히는’과 ‘살아 있는’ 사이에서 고민하는 밤의 길이. 민호는 ‘살아 있는’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었다.
“설계에서도 결국 그렇게 부르거든요. 도면대로 세운 구조물이 사람의 동선을 살게 할 때, 그때 비로소 살아 있다고.”
“그러면 오늘 우리의 점은… 살아 있네요.”
민호가 웃었다.
“살아 있는 점. 움직이지 않지만 시간을 통과시키는 표식.”
“점이 아니라 쉼표일 수도 있고요.”
“맞아요. 오늘은 쉼표로 하죠.”
그날 밤, 각자의 집에서 잠들기 직전,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동작을 했다. 책갈피를 확인하고, 아주 작은 점을 하나 더 찍는 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공동의 습관이 생겼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만남은 토요일 오전이었고, 하늘은 맑았다. 도서관 앞 장터에 작은 수공예 부스들이 줄지었다. 선미는 커피 냄새와 빵 냄새를 스치며 지나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낡은 엽서들이 집게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오래된 항구, 산책길, 노을 진 숲. 그녀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비상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손에 쥔 엽서의 질감이 어쩐지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거, 좋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민호가 손에 작은 스탬프를 들고 서 있었다. 조개 모양이었다.
“부스에서 사 왔어요. 혹시… 엽서에 찍고 싶을까 봐.”
“선물인가요?”
“예. 공동 사용 조건으로.”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선미가 엽서를 무릎에 올리고, 민호가 잉크패드를 열었다. 작은 조개가 엽서 구석에 찍혔다. 선미는 펜을 꺼냈다.
“오늘 한 줄.”
그녀는 적었다. 같은 장을 읽는 사이, 다른 삶이 덜 외롭다. 민호가 이어 썼다. 같은 장을 읽었으니, 다른 길도 견딜 수 있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엽서의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가 놓았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니, 어린이 낭독회가 막 끝난 참이었다. 작은 사람들의 소리와 큰 책들의 숨이 뒤섞여 따뜻한 장이 펼쳐졌다. 선미는 아이들 사이를 피해 창가 자리로 갔다. 민호가 의자를 빼 주었다. 그 자연스러움이 새삼 더 설레였다.
이번에는 각자 다른 책을 꺼냈다. 여전히 같은 장르, 다른 작가. 선미는 문장들이 눅진한 감정을 과장 없이 지나가도록 쓰인 산문집을, 민호는 오래된 도시의 골목을 도면처럼 그려 낸 에세이를 펼쳤다. 읽는 동안 둘은 메모를 최소로 했다. 대신 한 문장을 만나면 고개를 들고 서로의 얼굴을, 아주 잠깐 본다. “여기요.”라는 말 대신, 같은 페이지에서 잠깐 만나는 눈.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민호가 먼저 책을 덮었다.
“사실, 조금 떨렸어요.”
“뭐가요?”
“같은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을 펼치는 일. 혹시 우리가 멀어질까 봐.”
선미가 미소 지었다. “
멀어진 게 아니라, 넓어졌죠.”
그 말은 카페에서, 길에서, 집에서 오래 울렸다. 넓어진다는 감각. 같은 장을 읽되 서로 다른 속도를 허용할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은 설렘의 모양을 바꾸었다. 급하게 뛰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걷는 쪽으로.
그날 저녁, 카페 대신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해가 지고 난 뒤의 강물은 거울처럼 매끈했다. 가로등 불빛이 선으로 길게 늘어졌다. 민호가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잠깐의 망설임. 그러나 그 손은 아무것도 잡지 않았다. 붙잡지 않으면서 옆에 남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누군가에게, 설렌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지?”
선미가 낮게 말했다. 말이 너무 커지지 않게, 바람에 젖지 않게, 아마도 자신에게 묻듯이.
“저는…”
민호가 생각했다.
“소리 내진 않았는데, 오늘이네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소리 내지 않은 고백이 강물 위에 둥글게 퍼졌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날, 각자의 아침은 바빴다. 선미는 당겨진 마감의 첫 페이지를 다듬었고, 민호는 긴급 수정 의뢰에 회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쁜 오전을 지나 점심 무렵 두 사람은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점 하나.” 답장도 같았다. “쉼표.” 의미를 공유하는 두 글자 덕분에, 각자의 오후가 조금 덜 흔들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 선미가 먼저 제안했다.
“이번엔 우리 책 없이 만나 볼래요?”
민호는 반 박자 쉬고 대답했다.
“좋죠. 책 없이, 대신… 서로의 각자의 이야기 한 개씩 해보기.”
그 약속은 새로운 페이지의 첫 줄이었다. 억지로 넘기지 않고, 급히 접지 않으려는 두 사람의 속도. 설렘은 커졌고, 다만 모양은 조용했다. 가장 오래 가는 불빛이 대개 그렇듯이.